“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14)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한국을 위한 하나님의 비밀스런 3대 전략은 첫째, 강제추방전략, 둘째, 한글사용전략, 셋째, 종교교체전략이었다. 이미 언급한 강제추방전략과 한글사용전략에 이어 이번에는 종교교체전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일근대사 500년 동안 한국과 일본이 전혀 다른 길은 걷게 된 결정적 요인은 종교(사상)에 대한 양국의 수용 태도에 있었다. 사상적으로 한국인은 일원(단일) 구조인데 반해, 일본인은 이원(이중) 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시 다루고자 한다). 가령 일본에서는 신불습합(신도와 불교의 혼합)’이라는 말이 있듯이, 종교(사상)를 혼합하거나 절충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한 개인이 여러 종교를 믿는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잡혀간 성혼(1535-98)의 제자 강항(1567-1618)은 일본에 성리학을 전수했다. 그가 전한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의 주장을 절충한 성혼의 절충주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지켜야 할 절대적인 가 존재하지 않았다. 종교는 국체(國體)를 보전하는 한도 내에서 허용되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천주교)을 처음에는 받아들였으나 국체를 흔들 정도로 크게 성장하자 탄압에 나섰다. 유교 또한 국체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고, 결코 통치 원리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서구 제국주의가 동양에 밀려들어오던 19세기 중엽 이후 국체를 보전해야 한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탄생한 것이 전통종교인 신도와 천황제가 결합된 천황제 이데올로기(천황교)’였다.

126대 나루히토 일본 천황
126대 나루히토 일본 천황

그런데 조선에서는 유교뿐 아니라 그 어떤 종교도 절충주의나 혼합주의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 불교와 유교, 유교와 동학, 천주교와 개신교를 동시에 믿거나 절충해서 받아들이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은 유교 가운데서도 송나라 때의 주희(1130-1200)가 주장한 주자학(성리학) 이외에는 전부 사도(邪道)로 정죄되었다. 명조의 왕수인(1472-1529)의 학설인 양명학은 조선시대 내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 까닭은 이렇다.

주자학(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온갖 차별(적서차별, 남녀차별, 지역차별, 직업차별, 종교차별)에 기초한 주의였다. 이 같은 차별은 주자학(성리학)의 이원론적 사고에 기인한다, ()’에서 ’()’가 나온다는 것으로, 여기서 가 양반계급이고, ‘가 일반 백성이라는 것이다. ‘()’()’를 별개로 본 성리학자들과 달리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다. 이는 차별이나 우열을 인정하지 않는 사민(四民, 사농공상)평등 사상을 내포하는 것으로,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양명학자(하곡 정제두, 1649-1736)를 이단으로 몰고 간 핵심 요인이다.

 

조선은 왜 일본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그것은 한일 양국의 정치문화의 차이, 즉 한국의 경우는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도()가 깊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계속된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정치문화가 각계각층, 즉 위정척사파만이 아니라 개화파의 사상, 민란과 동학농민혁명도, 의병 전쟁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개국을 강요당한 일본은 서구와 전쟁을 피하면서 국체를 보전하고자 했다. 반면에 조선은 도()를 국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국인에게는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지키고자 한 도가 있었다. 군사적 전력이 열세임을 알면서도 프랑스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까지 쇄국을 고집한 것도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도() 때문이다. 그 도(종교)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까지 함부로 바꿀 수 없었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주요 요인이다.

그렇다면 수백 년 동안 지켜오던 동양의 유교(주자학)라는 종교(사상)를 외래종교인 서구 기독교로 교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유교(주자학)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한일합방)는 결론에 도달해야 가능했다. 마치 불교의 나라 고려가 유교의 나라 조선으로 교체되려면 불교 때문에 나라를 망했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전해지기까지 조선은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를 억압했고, 양명학도 이단으로 정죄했으며, 가톨릭도 탄압했으며(3대 교난), 동학(東學)도 서학(천주학)이라며 탄압하였다. 마침내 구한말 개국과 더불어 기독교가 들어왔고, 조선인은 시대정신에 어긋나는 유교(주자학)를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유교적 민본주의의 나라가 기독교적 신본주의나라로 교체됨을 의미했다.

유교와 기독교는 세 가지가 달랐다. 유교는 첫째, 과거 지향, 즉 새로운 학설인 명나라의 양명학보다는 송나라의 주자학에 매였고, 신생 강대국 청나라를 오랑캐로 업신여기며 이미 망해 없어진 명나라를 존숭하는 친명배금정책에 매였다. 둘째, 배제(뺄셈) 논리, 즉 자신과 주의(사상)가 다르거나(송시열을 비판한 백호 윤휴, 1617-80) 새로운 것을 포용하지 못하고 무조건 배척하고 없애는 주의였다(뺄셈은 덧셈을 이길 수 없다!!). 당쟁과 가톨릭 탄압은 그 좋은 예이다. 그 피해는 말할 수 없었다. 셋째, 봉건적 신분제, 즉 능력이 아닌 출신 성분에 따라 인간을 차별함으로써 근대화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송시열과의 대척관계였던 윤휴는 포의(布衣)의 신분이었을 때에도 학문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윤휴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에 주자의 해석과는 다른 독창적인 주석(註釋)을 담은 저술을 잇달아 내놓자 송시열은 ‘주자학의 수호신’임을 자처하며 윤휴제거에 앞장선다.
송시열과의 대척관계였던 윤휴는 포의(布衣)의 신분이었을 때에도 학문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윤휴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에 주자의 해석과는 다른 독창적인 주석(註釋)을 담은 저술을 잇달아 내놓자 송시열은 ‘주자학의 수호신’임을 자처하며 윤휴제거에 앞장선다.

이와 달리 기독교는 미래 지향(종말론적 소망),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포용(덧셈) 논리, 그리고 만민평등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3.1만세운동은 유교의 나라가 종언을 고한 사건이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교인(또한 천주교인)은 단 한 명도 없고, 그 대신 개신교인이 절반에 가까운 16(천도교 15, 불교 2)이었다. 3.1절의 함성은 한국이 유교(주자학)의 나라에서 기독교(개신교)의 나라로 대체되었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나팔소리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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