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섭리사관을 말할 때 필자는 김교신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왜 함석헌이 아니라 김교신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 이유는 김교신은 평생 성서(기독교)적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했기 때문이다. 김교신은 우리 민족의 높은 이상을 우리 역사와 지리의 긍정적 이해와 기독교의 섭리사관에서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함석헌은 기독교가 지니는 배타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배타성을 지니는 것은 예수의 진리가 ‘차원이 다른 배타적 진리’이기 때문이지 타종교가 틀리기 때문이 아니다. 즉, 모든 종교는 그 나름의 진리를 갖고 있다. 단지 어떤 진리냐 할 때 주어가 3차원인 인간(나)인 진리(타종교)와 주어가 4차원인 하나님(예수)인 기독교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평생 성서적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 김교신
함석헌과 김교신은 똑같이 우치무라의 제자였지만, 두 사람의 길은 달랐다.
우치무라는 한국만이 아닌 중국과 인도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인도의 시인 타고르(R. Tagor)와 영적 지도자인 간디(Mahatma Gandhi)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타고르보다 간디에 대해 더 깊은 존경을 표현했던 그는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간디가 아시아를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한국인도 간디가 영국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일본에 대해 말할 수는 없으나, 그를 따르는 한국의 제자들 가운데서 간디로부터 영감을 받은 한 사람이 일어나기를 소망했다.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함석헌 선생이 바로 “한국의 간디”(Korean Gandhi)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배타적(역설적) 진리’라는 것을 인식한 김교신 선생은 달랐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랐다. 함석헌은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서서 보다 넓은 길로 가고자 했지만, 일생을 성서적 진리에 입각해서 살고자 결심했던 김교신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좁은 문으로 가는 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마 7:13-14)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김교신은 그의 유명한 ‘산상수훈’연구를 통해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문’(요 10:7; 14:6)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읽어내고, 그 좁은 길로만 한평생 변함없이 걸어갔다.
2. 러시아 혁명가 네차예프(S. Nechaev, 1847~82)는 “혁명가는 오직 한 가지, 혁명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오직 한 가지, 예수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직 성서와 예수밖에 생각하지 않은 김교신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김교신의 제자였던 류달영은 훗날 스승 김교신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종래의 정통신앙보다 다석(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적 비정통신앙을 따라갔으리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하나님이 김교신 선생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깊은 뜻이 계셔서 종교다원주의에 빠져 있는 다석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일찍 데려가셨다고 생각한다. 김교신은 성서(하나님)를 가슴으로 만났기에 평생 한길로 갔고, 함석헌은 머리로 만났기에 결국 성서(하나님)를 떠나 종교다원주의로 갔던 것이다. 함석헌과는 달리 백치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1821~81)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보다 더 아름답고 깊고 자비로우며 슬기롭고 용기있고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 저편에 있고, 실제로 진리란 그리스도 외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해도 나는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곁에 머무를 겁니다.” 그러면서 “지상에서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유일한 인간은 바로 그리스도다. 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지닌 인간은 물론 그 자체로 무한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쓰인 것이다.”
3. 성서(기독교)가 말하는 섭리사관은 주어를 유일신(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주어가 바뀌었다는 것, 즉 ‘주어가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가령 “내가 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하게 하셨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에 의해 애굽에 팔려갔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에 앞서 보내셨다”, “요시다 쇼인이 1830년에 일본에서 태어났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시다 쇼인을 1830년에 일본에 보내셨다”가 된다. “조선이 일본에 멸망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조선을 일본에 내어 주셨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본을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게 하셨다.”
여기서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도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측면에서의 인간적인 행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섭리)이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한일근대사에 있어서 ‘조선의 최후’라는 역사적 사건들을 인간이 주어가 아닌 하나님을 주어로 볼 때 ‘한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는 전혀 다른 해석이 도출된다.
역사적 사건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보는 섭리사관
여기서 주의할 점은 ‘결정론적 역사’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론이 인간의 책임을 면제하거나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인간이 행한 모든 행위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며, 그에 상응하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따른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다만 그 심판이 징계 차원에서의 끝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이라는 은혜의 차원이 있음을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