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18광주민중항쟁> 5일 전인 1980년 5월 13일을 난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날부터 5일 동안 있었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만큼 내게는 그 시간들이 충격 속에서 진행되었다. 5월 13일 오후 2시경 연세대 정문 앞에서 난 학생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시작했다. “독재 타도,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신촌로타리를 돌아 이화여대 근처까지 왔다. 갑자기 전경들이 달려들어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닭장차라 불리는 전경버스에 실려 마포경찰서에 실려 갔다. 밤늦게 다시 연세대 학생들은 서대문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날 밤 유치장에는 발도 제대로 뻗지 못하는 좁은 공간에 학생 93명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 좁은 방에서 난 밤새 “역사란 무엇인가?”를 고민하였다. 다음 날 밤 10시경이 되자 김중기 교수님(연세대 학생처장)이 오시더니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11시경 집으로 돌아왔다.
2. 다음날 15일에 서울역에 나가보니 광장에 10만 군중이나 되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다. 곧이어 시위대는 광화문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난 뭔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은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마치 태풍의 눈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나도 조용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17일 아침에 눈을 뜨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학교는 폐쇄되었고, 3김씨는 자택연금(김대중 씨는 내란음모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18일에 드디어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5.18 광주사태라는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유신독재가 물러가고 새봄과 더불어 민주화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서울의 봄>에 대한 기대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무참하게 끝났다. 이 사건은 내게 “역사는 과연 정의의 방향으로 흐르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다.
3.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던 1979년 가을 학기에 김형석 교수의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를 들으면서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나는 5.18 광주사태를 계기로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막을 내리던 5월 27일 바로 직전, 이미 언급했던 종로서적에 가서 카(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한영판)을 사서 읽는 것으로 본격적인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 이 책에서 카는 역사를 “역사가와 사실 간의 상호 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간의 그칠 줄 모르는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이 정의에 따라 난 그때부터 ‘역사가와 사실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를 시작하였다.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성경 본문(Text)을 읽을 때 컨텍스트(Context)의 중요성, 즉 성경을 무시간적 진리를 말하는 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이 담고 있는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야만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해석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4.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읽은 책들을 간직하고 있다. 김형석 교수의 『헤겔과 그의 철학』을 필두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 박성수 교수의 『역사학개론』, N. 베르쟈에프의 『역사란 무엇인가?』, 차하순 교수의 『서양사총론』, 『역사의 본질과 인식』, 루이스 A. 코저의 『사회사상사』 등등이 그것이다. 이때 박성수 교수의 책과 차하순 교수의 책을 통해 <사관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베르쟈에프를 통해 그가 쓴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이라는 책을 알게 되어 학부 내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코저의 『사회사상사』라는 책을 통해 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세 가지 배경, 즉 가정적 배경, 지적 배경, 사회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뒤 연세대 대학원 신학과에서 구약학을 전공하면서 <이스라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대학원 시절 한국교회사와 세계교회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5. 대학원을 졸업한 후 장신대 신대원(M. Div.)에 입학한 첫 해인 1987년은 전두환 정권의 호헌 선언에 대해 국민들의 열화같은 호헌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6.10 민중항쟁이 있었던 해였다. 80년대에 가졌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 해에 김학준 교수의 『러시아 혁명사』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었다. 김학준 교수의 책을 통해 러시아 역사 및 공산주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또한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본래 일제 치하였던 1933년경부터 연재된 『성서로 본 조선역사』를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판된 책이다. 지금 다시 읽을 때 이 책이 과연 성서가 말하는 섭리사관의 관점에서 썼느냐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이 책을 읽은 소감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독교적 섭리사관으로 관점으로 쓴 것으로 보고 많은 감화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