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오후9:53분에 해운대 순복음 교회의 정경철 목사님이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참으로 큰 형님같고 늘 사랑으로 대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던 목사님이셨습니다.
우리 교단의 총회장 임기를 다 마치시고 이제 9월에 퇴임을 앞두고 76세에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는 사랑의 목자였고 성령의 사람이며 헌신과 희생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직전 총회장으로 총회 임원들이 3일동안 숙식을 하면서 모든 장례를 총회장으로 치루었습니다. 장례 예식을 시작부터 끝까지 참여하면서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고 참으로 멋진 장례식이라는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귀한 목사님이 또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생은 그 누구나 한 번은 죽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소원이 있다면 잘 태어나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유행하는 “구구팔팔이삼사” 인생이 복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99세까지 88(팔팔)하게 살고, 2~3일 앓다가 4일 만에 죽는 죽음이 멋진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된 죽음을 하기 위한 비결은 "일십백천만"의 이론을 실천하면 된다고 합니다. 일은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좋은 일을 하고, 십은 하루에 열 번 이상 웃고, 백은 하루에 백 자 이상 글을 쓰고, 천은 하루에 천 자 이상 글을 읽고, 만은 하루에 만 보 이상 걷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죽음을 모두 당하기에 깨닫고 생각하여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인생은 한순간에 지나 간다는 것입니다.
시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는 본문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며 이러한 허무한 인생 가운데 어떤 삶을 살아야 보람된 삶인지 알려줍니다. 이를 위해 모세는 허무가 어떻게 왔는지를 말한 후에 그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의 비결을 노래한 것이 오늘 모세의 시편입니다. 시인은 먼저 인생의 허무를 알려주기 위해 몇 가지의 강한 은유를 사용합니다.
9절에 우리 인생이 한숨’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식간은 (헤내흐)라는 히브리어인데 ‘한숨’ 또는 ‘탄식'을 의미합니다. 한숨이라고 할 때의 뜻은 한번의 호흡이라는 뜻도 되고 괴로운 숨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우리의 인생은 아무리 길어야 한숨과 같으며 또한 괴로운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삶을 다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우리의 평생이 한번의 괴로운 숨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대해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출생할 때 순식간에 태어나고 죽는 순간도 마지막 호흡으로 순식간에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출생과 죽음 사이를 ‘삶’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 ‘삶’의 시간도 영원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지극히 짧은 한번의 호흡 같은 것이요 밤의 한 순간과도 같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순식간이요 허무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다가 죽음 바로 직전에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인생을 다시 살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맞기 전에 우리 인생이 밤의 한 순간과 같고 한번의 한숨과도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시90:10에“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이 이와 유사합니다. 믿음의 조상 야곱은 자신이 원했던 것은 모두 다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형에게서 장자권도 빼앗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고, 네 명의 아내와 12명의 아들을 두었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로 앞에서 말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하였습니다.
사느냐고 열심히 살았는데 험악한 세월 힘든 시간 고통의 시간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시90:12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이 말은 자신이 몇 살인지, 이제 남은 세월이 얼마인지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에 대하여 어린 학생들은 자기들을 어린아이 취급하지 말고 어른으로 대해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점점 많아 지면 어떻게 해서라도 나이가 적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자기 나이답게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남은 세월에 대하여는 더 모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킨 사람은 행한 대로 상급을 받습니다. 계14:13에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행한대로 받고 저 세상에서도 행한대로 받습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넉넉한 구원이고, 둘째는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벧후1:10.1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넉넉한 구원을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아직 어린아이 상태에서 성장 합니다. 성장에는 고통의 과정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성인이 되면 다시는 그런 염려가 없이 스스로 걸어갑니다.이것을 구원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실족치 아니하리라"는 넘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는 구원 받을 만한 믿음과 행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은 예수님 좌편의 강도와 같은 구원입니다.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간신히 겨우 얻은 구원입니다. 구원이 되어도 넉넉한 구원이 있는 반면에 부끄러운 구원도 있습니다.
이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하여 주십시오(눅23:42) 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받기는 받았는데 하늘 나라를 위하여 일한 것도 헌신한 것도 없이 겨우 겨우 받은 구원입니다.마치 집이 불에 다 탈 때 겨우 생명만 건진 구원을 말합니다.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이왕이면 우리 모두가 넉넉한 구원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들은 죽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의 죽음과 동시에 지옥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죽음은 저주이고, 불행이고, 고통이고, 단절이고,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시즘을 주도한 이탈리아의 정치인이요 사회주의자인 뭇솔리니는 죽음이 두려워 사형 형장에 끌려가면서 잠시 동안 머물러 달라고 세번이나 애원을 했으며, 공산주의의 창시자 스탈린은 임종시에 두려워 떨며 소리를 지르고 발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화형대 앞에서도, 십자가 앞에도, 사자들 앞에서도 감사하며 찬양하며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끝이지만 주님 안에 있는 신자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 참 안식과 위로, 상급을 받는 삶의 새로운 출발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으로 거주지가 옮겨가는 것입니다. 히11장 5절에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천국은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악한 자들이 없고 의인들만 거합니다(히 12:22-24).
악한 사탄의 유혹이 없는 곳으로 천사들이 영광 중에 성도를 수종드는 곳이며(히 12:1-5).
생명수와 생명과가 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걱정하고 투쟁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딤후 4:8).
우리 앞서간 사랑하는 가족 친구를 만나볼 수 있는 곳으로 사랑이 충만한 곳이며(고전 13:13).
죄가 없고(계 21:27).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며 예수님이 친히 목자가 되는 곳입니다.
다시는 죽음이나 질병이나 근심이나 걱정이나 번민이나 슬픔이나 고통이나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없는 곳입니다.
오로지 위로와 만족과 평안과 안식만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으로 성화가 완성됩니다.
고후 5:1은"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세상에서 열심히 행한 일들을 인하여 하늘의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를 사명을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잘 죽(well dying)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사는 것(well being)은 더욱 중요합니다.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 말씀한 것처럼 이 땅에서 각자에게 맡겨준 사명을 잘 이루어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수고한 일은 절대로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고전15:58).
바울은 미래에 하나님께 받을 상을 바라보고 주의 일을 했습니다.
행20:24에 바울 사도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을 다 이룰 때까지 우리 하나님이 나를 천국에 데려가지 않는다는 자세로 이 땅에서 천국처럼, 천국 복음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아직 해야 할 사명이 있어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도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는 하나님이 이 땅에 있게 하신다는 믿음으로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사명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된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은 영혼이 우리 몸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흙으로 지어졌고(창2:7) 하나님이 그 흙으로 만든 몸에 영혼을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우리 몸속에 살다 떠나는 것이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죽음은 이 땅의 장막이 무너지고 영원한 집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고후5:1). 죽음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 영혼을 데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의 죽음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말씀합니다(창5:24). 그래서 죽음을 불완전한 몸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몸이 쇠약해져서 불편하고 괴롭고 힘듭니다.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육체의 많은 불편함이 있으나 죽음은 이러한 고통에서 완전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2/3는 의료기관에서 죽음을 맞이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죽음보다 나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존엄하고 평화롭고 안락한 죽음이 아니라 의료 기기에 의해 수명만 연장하다가 고통과 우울감, 비탄 속에 홀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기 1개월 전에 평생 쓰는 병원비의 36%를 쓴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6%를 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기 6개월 전에 평생 쓰는 병원비의 절반 이상을 쓰는 반면 미국 사람들은 33%를 쓴다고 합니다.
전에 문화부 장관을 지내었던 이어령 교수님이 암 선고를 받았는데 그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의사가 ‘암’이라고 했을 때, ‘철렁’하는 느낌은 있었으나 ‘절망하지 않았다’고 했답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죽음의 연습’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과일 속에 씨가 있듯이, 생명 속에는 죽음도 함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이 교수는 방사선 치료도, 항암 치료도 받지 않았답니다. 간혹 병원에 가서 병원에 가서 건강 체크만 하였다고 합니다.
‘투병(鬪病)’이란 용어를 쓰지도 않고 대신, ‘친병(親病)’이라고 불렀답니다. “암과 싸우는 대신, 병을 관찰하며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히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 복되고 아름답게 사명을 잘 감당하시면서 살다가 넉넉한 구원으로 우리 모두가 천국에 들어 가는 복된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