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자도 실천 (눅 19:1-10 찬송가 278장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시)
오늘날도 사람들에게 이름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태어나면 작명가를 찾아갑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성경의 이름은 일반 이름과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왕자로서 권력을 가지다”라는 뜻인 이스라엘로, 사무엘은 “하나님이 들으신 자”로 , 게바는 베드로(반석)로 바뀌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날 때부터 삭개오인지 예수님이 불러주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삭개오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간 자를 보고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삭개오가 히브리어 “자카이”입니다. 헬라어로도 “자카이오스”입니다. 히브리어로 “자카이”는 “순결하다”, “정결하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러주는 별명인지 이름인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을 부르는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자 죄인이라고 듣곤 했습니다. 지나가면 사람들이 “저기 죄인 온다”라고 수군거립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인생 전체를 바꾸는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뒤에 본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수십 년을 살아도 변화 없이 살아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짧은 시간이라고 해서 변화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반나절 밖에 안 되지만 그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뽕나무에서 내려와 집에 가기까지 한나절 밖에 안된 짧은 순간 삭개오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기 죄인 간다.” “죄인의 집에 예수 간다.” 이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님 예루살렘 가는 길에 바쁜 일정에 여리고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삭개오가 예수님이 어떻게 생긴 분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유명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는가? 키도 작은 사람이, 어른이, 정장 차림을 하고 달려가는 모습, 그리고 뽕나무에 올라가는 모습,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했을까? “저기 죄인 뛴다.” “죄인 뽕나무 올라간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뽕나무 아래까지 오시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저기 죄인있다.” “죄인이다.” 외쳤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정결한 자 순결한 자야 급히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억만 장자일 수 있습니다. 그 재산의 절반을 바치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충격입니다. 그에게 무슨 충격적인 변화가 있었으면! 지금까지 그는 죄인으로 낙인찍힌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만났기 때문에 낙인이 벗겨지는 역사적 순간이 그에게 왔습니다. 바리새인이 와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면 매우 배가 아팠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 앞에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나누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열려서 재산까지 공개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름에서 “순결한 자”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름의 회복 명예의 회복을 얻은 것이 어떤 재산보다 더 귀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뽕나무에서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삭개오는 큰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내 이름을 되찾아준 분 앞에서 낙인찍힌 이름에서 새 이름으로 되찾아 준 때문에 그에게 그의 재산을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재산을 다 바치고 살아가겠다는 의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삭개오가 하나님께 맡겨놓고 예수님을 따라갈 때 참 제자의 모델임을 누가복음은 선언합니다.
이름을 불러줄 때에 삭개오는 예수님께 다가와 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그 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삭개오는 제자도를 실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구원받은 은혜를 깨달았으면 삭개오처럼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삭개오의 회개 (눅 19:1-10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받고자)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이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낙인이 찍혔다면 가급적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는 곳으로 다니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자리인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자리에 자신의 몸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오늘 세리장 삭개오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 자신의 몸을 과감하게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삭개오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을 무릅쓰고 뽕나무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아니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발견되고 싶었습니다. 지금 뽕나무가 있는 그 자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나가야 할 길목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예수님의 눈에 띄기 위해서는 그 길목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행여나 사람들 틈에 파묻혀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놓쳐버리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고 “앞으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3-4절).”
성경은 삭개오가 “앞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앞으로 달려갔겠습니까? 정장을 한 관리가 다급하여 사람들 앞으로 달려가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리고로 지나가는 예수님을 그는 일생동안 한 번밖에 없는 기회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간 그는 여리고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뽕나무 위를 쳐다보는 예수님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삭개오를 발견한 예수님은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즐겁게 영접하고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셔 들인 삭개오가 서서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주께 여쭙고 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오늘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바치겠다고 선언하는 물질은 그의 재산 중 얼마에 해당하는 것인가요? 먼저 가난한 자를 위해 절반을 바치고 그 다음에 그가 토색한 것에 대하여는 4배가 갚겠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전 재산을 예수님 앞에서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그의 재산을 바치겠다고 선언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이켜 회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삭개오의 회개는 단순한 마음의 뉘우침으로 끝나는 영적인 회개가 아니라 어떤 댓가라고 치루겠다는 물질적 희생을 동반한 회개입니다.
3. 믿음으로 구원받음 (합 1:1-4, 2:1-4 찬송가 나주의 도움받고자)
오늘 본문의 기록시기는 “바벨론의 침공을 받기 이전에 B.C. 605-600년 경”입니다.(Howard Wallace) 이 시기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가기 약 10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 이리이까” 선지자가 부르짖어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것은 이방 나라 바벨론의 악인들이 유다에 강포를 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선지자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망루에 올라가서 서서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응답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은 묵시가 정한 종말의 때가 속히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종말의 때에 악인들은 “그들 자신의 파괴의 씨들을 나를 것인” 반면에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씨들을 나를 것”입니다.(Howard Wallace)
이같은 재난이 왜 유다백성에게 임한 것인가? 겁탈과 강포로 말미암아 율법이 해이해 지고 정의가 시행되지 않고 정의가 굽게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3-4). 하나님은 이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이방의 나라 바벨론 마병대를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에 악인들은 교만과 강포를 금새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며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4. 의로운 주의 율법 (시 119:137-144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오늘 시편 본문은 문장의 첫 글자가 히브리에 “차데”로 시작하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의롭다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주의 계명이 의롭다는 말입니다. 주의 계명에 대한 정의도 6번이나 나옵니다. “주의 증거”, “주의 말씀”, “주의 법도”, “주의 의”, “주의 율법”, “주의 계명.” 이 시편 단락에서 주의 계명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단어가 6번이나 등장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문구를 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지만, 주의 법도를 잊지 않고 지키겠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멸시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주의 법도를 사랑하여 잊지 않고 지키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의 율법이 진리이기 때문에 의롭고 성실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뿐만 아니라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대적자들은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교만에 빠졌으나 말씀을 기억하는 시인은 마음에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5. 은혜와 평강 (살후 1:1-4 찬송가 336장 환란과 핍박중에도)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3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2)”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장하는 믿음과 풍성한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아 교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성장하는 믿음과 풍성한 사랑이 있는 좋은 교회라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는 사도 바울이 그 교회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다는 것을 서두에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시험을 당하고 있는 교회에 은혜와 평강이 중요한 처방 약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때에는 기본에 충실한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기본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있고 부족함이 없어 보여도 교회가 기본에 충실하지 못할 때에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은 교회의 교리의 토대입니다. 교회는 신앙고백과 교리가 견고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방법과 수단을 강구해도 시험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몇 구절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불법의 아들들 중 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대적자로 자리를 잡고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데살로니가 교회안에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 두려워하는 사람, 미혹되는 사람, 그리고 배교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1: 5)”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1: 6)”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1-7)”,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1: 4).”
그러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의 전통을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합니다.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