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효목사, 1983년 2월 스위스 사역시작,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 담임. 총신대학교신학 대학원졸업, 스위스한인교회 홈피 www.koreanchurch-swiss.com
김정효목사, 1983년 2월 스위스 사역시작,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 담임. 총신대학교신학 대학원졸업, 스위스한인교회 홈피 www.koreanchurch-swiss.com

내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스위스로 이주해 왔던 때가 1983년 2월 초였는데, 그 달에 현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첫째 딸이 첫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1. 계속되는 시련으로 인해

필사적으로 주님께 매달려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스위스에 온 지 두 달째 되던 어느 날 나는 뜻밖에도 이곳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습니다. 알고 보니 집에서 혼자 쓰러져 있던 나를 아내가 병원으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정밀검사 결과는 나에 게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습니다. 졸도의 원인이 바로 뇌종양과 뇌출혈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중환자실 병상에 누워 ‘하나님! 지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그래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좀 하다가 죽 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밖에서 모니터로 나의 상태를 지켜보던 간호사가 들어와서 ‘당신 아내가 곧 방문 올 터이니 울지 말라! ‘며 나를 달랬습니다.

당시 대학병원의 신경외과 교수는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에 특별히 초빙되어온 연세가 많은 노르웨이 의사였는데, 그는 자신이 신경외과 분야의 세계 일인자라며 ‘당신이 나를 만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라고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스위스에서 마지막으로 수술을 집도한 환자였 습 니다. 그가 이 수술을 마친 후 곧바로 그의 고국 노르웨이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손바닥만큼이나 크게 자란 뇌 속의 종양제거와 고여있는 혈액 제거 수술은 12시간도 더 걸린 대 수술이었습니다. 나는 전신 마취 상태에서 긴 수술을 받은 후 닷세만에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내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습니다. 나의 몸은 움쩍달싹도 할 수 없는 반신마비의 상태였기 때 문입니다.

그렇게 나의 기나긴 투병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지속적인 두통과 어지러움과 젖은 빨래를 비틀어 짜는 것 같은 마비된 근육의 통증과, 앉아서도 누워서도 몸을 가누지 못해 이리저리 나뒹굴어지는 불구의 상태로 인해 나는 깊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들었습니다.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일지도 모른다는 어떤 사람들의 말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 했고, 회복되기를 기다려주고 격려해주기보다는 ‘왜 이곳에서 이러고 있느냐? ‘는 주위 한인들의 책망하는 듯한 말투와 ‘아내 고생시키지 말고 그냥 돌아오라! ‘는 집안 식구들의 성화는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너무도 외로웠습니다. 너무도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 게도 나의 이 외로움과 심적 고통을 토로할 수는 없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돌팔매질을 당하는 죄인의 심정으로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시련 속에서 내가 바라볼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몸부림치듯 맹 훈련을 했습니다.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 같은 삼 년 세월을 보낸 후 나는 마침내 완전히 정상적으로 거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제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 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시편 121:1-2)“

2. 금식이 일상화된 삶이었습니다.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많은 치료비가 밀려 있어 치료비를 갚기 위해 병원 수술실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 니다. 수술실 마취과 수간호사의 배려로 6년 교육과정을 거쳐야하는 일자리 하나가 없어지고 그 자리 에 내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안에서 수많은 환자들과 수많은 수술장면들을 목격했고, 온 종일 끼니까지 걸러가면서 수술에 매달리고, 하던 수술을 마무리하기 위해 허다히 밤 늦게까지 일을 계 속해야 할 뿐 아니라, 밤늦게 수술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수술이 제대로 되었나 재차 확인하기 위해 서 다시금 환자 입원실을 찾아 환자의 상태를 꼼꼼히 살핀 후에서야 비로소 퇴근길에 나서는 의사들의 정성과, 온종일 환자들의 환부의 피고름을 닦아내며 약을 발라주고, 환자의 몸에서 나오는 온갖 배설물들을 받아내고 씻겨주면서도 얼굴한번 찡그리지 아니하고, 싫은 기색 한번 보이지 않으면서 환자들 을 간호하는 간호사들의 노고를 보면서, 이들이야 말로 참으로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 습니다. 육(肉)을 치유하고 살리는 의료진들의 열정과 정성이 이러할진대 심령(心靈)을 치유하고 살리 는 목회자의 열정과 수고 역시 결코 이들에 뒤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독일어에서 ‘치유한다‘는 뜻의 동사형은 ‚하일렌(heilen)‘인데, 이 단어는 ‚거룩하게 한다‘는 뜻 으로 쓰이기도 하며, 이 단어의 형용사 형인 ‚하일리히(heilig)‘는 ‚거룩하고 신성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의 스위스에서의 목회사역은 바젤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바젤에서 목회를 시작할 무렵 나는 다시 건강상의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병원일을 하면서 밀린 치료비 다 갚고, 마침내 누리게 된 안정된 삶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나를 목회지로 내보내시기 위해서 주신 시련으로 여겨집니다.

나의 목회사역은 그 후 취리히와 인터라켄으로까지 확장되었는데, 나는 목회사역이 취리히로 확장되면서 병원일을 그만두었고, 그 후 지금까지 줄곧 취리히, 바젤, 인터라켄 세 지역을 순회하며 목회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바젤에서 목회를 시작할 무렵 여전히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이 일이라도 하다가 죽겠다는 각오로 목회사역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건강을 위해 서 그리고 목회사역을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한 금식기도는 너무도 절박했기 때문에 일주일에 이틀도 하고 사흘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십일 금식까지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일주일에 하루 24시간을 금식하는 시간으로 정해 놓고 정기적으로 금식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30년 이상을 계속해왔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내 몸의 병들이 모두 저절로 나아 버렸고, 지난 30년 동안 몸이 아파 교회 일을 거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아프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매번 하나님께서 목회사역에 차질이 없게 해 주셨습니다.

바젤에서 목회를 시작하기 전 나는 3년간 세 차례나 큰 수술을 반복해서 받았습니다. 그러나 낫지 않 았고 수술부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응급실을 찾아야 할 정도로 상

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거의 자포자기에 빠져있을무렵 바젤에 거주하시는 나이가 많으신 한 교인분으로부터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때 이 일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여겼고 그래서 '이제는 이 일 하다가 죽겠다! ‘는 각오로 바젤 교회에서의 주일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 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어느 날인가 수술실 일을 위해 수술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하필이면 그 때 마침 수술실에서 자기 일을 마치고 평상 근무복 가운으로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에 들어온 나의 담당의사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당신도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습니까? ‘고 물었습니다. 몇 천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병동에서 일하지 않는 한 같은 병원직원이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는 ‘당신의 몸에 고질적인 염증이 있는데 어떻게 소독이 철저한 수술실 일을 합니까? 혹시 당신 정형외과 수술실에 도 들어갑니까? 이것 큰일 났네! 당장 인사과에 보고해야겠네! ‘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나를 병원 에서 내보내게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정형외과 수술실은 뼈를 수술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만큼 소독 관념이 더 철저합니다. 그러기에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나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 덜컥 겁이 난 나는 그에게 ‘예, 그렇다면 한번 더 수술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그래요. 당신도 같은 직원이니 내가 이번에 우리 부서에 새로 온 교수님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 분은 스위스 제 일인자 이십니다‘라고 말하곤 그의 다음 업무를 위해 바삐 탈의실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그 후 그는 나에게 새로 온 교수에게 수술예약을 받도록 면담 날짜와 시간을 통보해줬습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음에도 낫지 않은 고질병이었습니다. 수술을 다시 받는다 해도 수 술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수술 후 입원해 있는 동안과, 자택에 머물며 통원치료를 받는 동안은 목회사역도 중단해야 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크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달리 방도가 없었던 나는 사흘 금식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제발 이 수술을 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차피 낫지 않을 병으로 여겼기에 낫게 해달라는 기도는 더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 나의 담당 의사의 지시대로 그날 교수의 검진을 받으러 갔습니다. 나이가 꽤 지긋하신 분이었습니다. 나의 담당 의사도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진료기록을 손에 들고서 그간의 과정을 길게 설명 했습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난 교수는 ‘어디 한번 봅시다! 고 하고서 나의 수술부위를 찬찬히 살폈습니다. 그런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술은 필요 없습니다! “

그 말을 듣고 나도 놀랐지만, 나의 담당의사는 더 놀랐습니다. 그는 큰 목소리로 ‘그럴리 없습니다! ‘고 말하며 교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그러면 당신이 다시 한번 보시오! ‘라며 자리를 비켜줬습니다. 그 때 나는 교수의 그 말이 당장 재수술을 받아야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나의 담당의사 역시도 자기에게 와서 계속 치료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교수의 말은 실제로 나의 수술부위가 다 나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그 지긋지긋한 고질 병이 내 몸에서 사라졌고, 그로 인한 여러가지 합병증 증상들도 사라졌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나는 다시 수술실 탈의실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인사말을 건네며 ‘이제 다 나았습니다! ‘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나 그 말 못 믿어요! ‘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그를 찾을 필요가 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이 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해서 급히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에도, 그리고 조깅 중 무릅뼈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해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에도, 오직 목회사역에 차질이 없기를 바라는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수술날자와 시간까지 다 정해진 상황에서도 수술 직전에 수술이 취소되도록 상태를 호전시켜 주셨고, 몇 년 전에는 뇌경색증상으로 인해 급히 병원으로 옮겨 지기까지 했지만, 하나 님께서는 단 몇일 만에 멀쩡하게 두 발로 걸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물론 6개월 후에 다시 한번 정밀검 사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퇴원시켜준 것이었습니다.

뇌경색은 갑자기 뇌혈관이 막혀 생기는 증상으로 대개는 죽거나 반신마비가 되거나 아니면 심한 신체적 장애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 입원당시 나를 담당했던 대학병원의 신경외과 의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에게서 뇌경색이 진행되다가 멈춰버렸기 때문에 당신은 더는 이 일로 병원에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가복음 10:27)“

 

3. 섬김과 봉사가 일상화된 목회였습니다.

지난 사십 년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돌봤습니다. 한 나이 많은 교인분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여러 고질병들을 안고 생활했는데, 나와 아내는 치료를 위해서 매주 두세 번씩 이 분을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이분이 수술을 받거나 입원하게 될 경우에는 아예 이분 집에서 숙식을 하며 이분을 보살폈습니다. 이분이 사시는 곳과 우리의 거처는 차로 두시간 반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한국에 있는 이분의 자녀들이 이분을 모셔갈 때까지 이 일은 26 년 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IMF사태 때에는 교회에 출석하던 상사직원들이 본사의 구조조정으로 모두 떠나고, 불시에 몰려온 수십명의 농자 (聾者)들이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었는데, 불법 체류자들인 그들은 합숙을 하면서 길거리에서 열쇠고리 같은 악세사리를 팔아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냈습니다.

당연히 많은 곤란한 문제들이 생겼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나를 찾았고, 나와 아내는 그들을 위해서 때론 병원으로, 때론 경찰서로 서둘러 가야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 때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 을 위해 설교문을 그들 숫자만큼 복사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 둘 돌아갔는데 경찰에 붙들려 강제로 추방당하기도 하고, 꽤 많은 돈을 모아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모두 돌아가기까지 거의 5년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나와 아내를 부모처럼 대했고, 언젠가 아내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에는 FAX를 이용해 이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동료들과 한국으로 돌아간 동료들에게 연락하여 아내의 건강회복을 위해 합심하여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해외여행 붐이 일어나면서 수많은 여행자들이 교회를 찾았는데, 그들 중에는 불시의 사고로 우리 부부를 찾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여행 중 소지품을 도둑맞은 사람들, 강도를 만나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긴 사람들, 여행 중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생긴 사람들 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시에 우리를 찾았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어 돌아갈 때까지 그들을 재우고 먹이며 그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사람들이 ‚당신네 집은 호텔입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돌보고 섬겼습니다. 우리 부부가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을 기꺼이 돌보고 섬겼던 것은 누구든 우리를 찾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께로 인도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중 한 분은 학생시절에 스위스에 여행을 왔다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게 되었는데, 우리 부부는 이 학생의 병원치료를 위한 통역과 엄청난 액수의 치료비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해야 했고, 이 학생은 퇴원한 후에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한동안 우리 집에 머물며 완전히 회복을 한 다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그녀의 부모로부터 참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쯤 50대 초반으로 여겨지는 그녀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데, 본시 믿지 않았던 그녀가 그 후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는 열심 있는 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 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라디아서 6:9-10)“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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