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의 맘몬 신을 깨뜨리고 진리의 개혁을 힘 있게 이루어가기를

충진교회 집사, 대구신대 강사 역임

맘몬이란 “부(富), 돈, 재물, 소유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대립되는 우상 가운데 하나를 이르는 말. 혹은 신이나 악마를 이르는 말”이라고 국어사전에 정의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면서 교회가 함께 부유해졌고, 그 과정에서 온갖 종류의 맘모니즘의 양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돈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가치는 돈이 노동의 신성한 대가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돈은 선한 일에 끝없는 동기를 유발해 주는 원천이다. 현실의 삶 속에서 나오는 감사와 속죄의 표시로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기초 사상은 이윤의 사회적 환원, 소명의식, 청지기 사명, 깨끗한 상거래와 같이 돈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다.

반면 돈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가치는 이렇다. 마르크스의 경제관에 따르면 인간의 만족은 맘모니즘(배금주의)에서 나오며, 역사는 변증법적 진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자연히 사유재산은 악의 근원이 되어 계급투쟁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모든 노동자는 단결하라."는 공산주의 사상은 돈을 단죄의 대상으로 여겼다.

한편 로마인들의 경우 재산권이란 개인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권한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의견이 개입될 수 없고, 그 소유주가 그것을 어떻게 처분하거나 취급해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서 널리 읽힌 대표적 예언서인 [정감록]마저 이렇게 충고한다.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큰 부자가 되면 맞아 죽기 쉽고 빈자가 되면 다른 사람의 발에 밟혀 죽기 쉽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굴의 기도를 통해 돈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7-9).

돈 자체는 아름답거나 더러운 것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편리를 주기 위해 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예지를 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사물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단지 우리들의 생각에 따라 좋고 나쁨이 갈라진다."고 말했다. 베이컨도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한다. "주시는 자도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이시다.(욥기)" 돈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일 뿐이다.

예수님은 자족과 신뢰와 미래의 지혜로움을 가르쳐 주신다. "돈을 구하기 전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들이 돈으로 믿음을 결부시켜서 교회에 가면 돈 내라는 소리만 죽도록 들어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세상 속에서 힘든 전투를 하고 교회에 와서 영적 충전을 받고 “수고하고 무거운 자여 이리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겠다”고 하신다는 말씀대로 평안한 쉼을 얻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작정이니 절기니 기타 등등의 제목으로 헌금하는 봉투만 들이대며 헌금을 강요한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서 자발적 헌금은 귀한일이고 그 헌금은 아름답게 쓰여 져야한다.

하지만 무리한 헌금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너무 부담이 된다면 이는 하나님이 원하기는 헌금생활이라 할 수가 없다. 교회를 떠나거나 카톨릭으로 옮겨가는 기독교인들의 이유는 헌금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정말 본질적인 일에 헌금을 요구하면 그래도 좋지만 이벤트성 행사나 외형치장을 위해서 혹은 과시하시 위한 한 여러 가지 일들을 위해서 헌금을 요구한다. 지쳐있는 영혼을 우리 예수님은 긍휼이 여기고 위로하셔서 힘주시고 세상을 이기게 하려 하는데, 오히려 교회 안에서 빚쟁이 같은 마음을 가지게 만들고 헌금을 적게 내는 사람은 완전 죄인이 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맘몬이 교회 안에서도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속종교는 민중들의 부요 욕구에 부응하여 저들의 소원에 봉사할 때 백성들의 과도한 욕구를 합리화해 주고 정당화해 주었을 뿐 아니라, 저들에게 축복을 선사하였다. 비록 돈을 크게 번 사람이 불의하고 악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할지라도 무속종교는 그 많은 돈 때문에 그 사람과 그 불의한 방법을 정당화해 주고 또 사면해 주며 위로해 준다. 복을 빌어주는 기관으로서 무속종교는 백성들의 위로와 소망이었다. 종교가 이런 임무를 담당하는 사회에서는 백성들은 이기적이 되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일반적으로 축복전달 내지 축복선사 기관으로서, 그런 축복을 무상으로 베풀지 않는다. 종교가 베푸는 축복은 항상 유상으로 되어 진다. 그 축복은 항상 제출된 돈에 대한 갚음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진정한 축복은 무상으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축복에 대한 응당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고, 또 그 대가는 사전에 지불되어야 했다.

그래서 종교가 선사하는 축복도 반드시 복채처럼 먼저 바쳐야 시행된다. 항상 드려진 돈에 대한 갚음의 형식으로 축복은 베풀어진다. 더욱이 축복종교는 바침으로 축복이 온다고 가르쳐, 더 많은 축복에 대한 열망을 백성들의 마음에 채우고 또 그렇게 충동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돈을 연보한 사람을 축복종교는 항상 우대하고 더 축복해 준다. 그러니 백성들이 복을 더 받으려고 재산을 많이 바치게 되고, 바친 것보다 몇 배의 재산이 축복의 형태로 되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재산을 모두 바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불교가 2천여 년 동안 백성들의 기복욕구를 충족시키는 축복종교로 둔갑하여 백성들의 전답과 재산을 수탈하여 부요 위에 부요를 더해갔으나, 백성들은 가난에서 가난으로 행진하였었다. 서양에서는 로마 교회가 사후 축복을 보장해 줌으로 인민을 수탈해 왔고, 무지한 백성들이 죽은 자의 안녕을 위해 거지가 되는 신세로 전락되기를 사양하지 않았었다.(서철원 교수의 “맘몬신 소고”에서 발췌)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바로 이 수순을 밟고 있기에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돈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성경은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잠21:6)하며 돈을 모으는 방법도 중요함을 말한다, 만일 목회자가 물질을 많이 바칠수록 부자가 된다고 선포하여서 교인들의 재물을 끌어 드린다면 그것은 매우 비성경적인 일이다,

누가복음 16장 14절에서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는 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다고 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 대신 돈을 마음에 두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을 누구보다 위한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얼마든지 두 주인을 섬길 수 있고 또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잘 섬길 수 있다고 믿었다.

바리새인들이 비웃는 이유는 겉으로는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한 것이요 이면에는 하나님 대신 돈이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자는 이미 악의 뿌리가 내려졌기 때문에 결과는 죄악의 열매임을 부인할 수 없다.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돈은 관리의 대상이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물질을 관리할 책임과 의무가 주어져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 와 있는 맘모니즘은 무속신앙을 능가하는 기복신앙과 더불어 목회자 자신을 현혹할 뿐 아니라 교인들을 현혹한다.

물론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잠 14:24 )고 한다. 돈이나 재물자체가 악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돈을 버는 방법도 수단도 목적도 정당하다면 너무나 바람직하다. 하지만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속담이 있기까지 하는 우리민족은 돈버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에 문제가 있다.

교회들부터 부동산을 사고 값이 오르면 축복받았다고 자랑을 한다. 우리나라의 부동산값은 너무 비정상적이다 정상적인 경제형태가 아니다. 교회는 이에 대해서 교인들이 부동산투기로 돈버는 것을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 여호와께 가증한 것”(신명기 23:18)이라고 한다.

성경은 또 과중한 이자를 받아선 안된다고 말한다. “네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利息·이자)을 취하지 말지니”(신명기 23:19). “높은 이자로 재산을 늘리는 것은 마침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로 베풀어질 재산을 쌓아 두는 것”(잠언)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도 주식투자 나 부동산 투기로 엄청난 높은 이익 얻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면 복 받았다고 간증하기도 한다.

돈과 결부된 나라의 굵직한 사건의 중심에 기독교인들이 있음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이는 당사자의 책임과 더불어 돈만 교회에 많이 내면 훌륭한 교인이라고 칭찬하고 치켜세워주는 목사들이 분제다. 또한 소위 교회에서 돈을 항존 직분을 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교회와 목회자의 책임이 크다. 설교시간 내내 돈을 끌어내기 위한 설교만 하시는 목사님도 있다. 예수님을 설교하지 않고 돈을 설교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맘몬 신에 사로잡힌 모습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하며 자원해서 해야 한다. 그리고 삶 가운데에서도 이웃을 향하여 복음을 위하여 사랑실천을 위하여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개교회의 힘에 부치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건축이나 새로운 이벤트를 위해서 빼앗다 시피 하는 헌금은 과연 주님께 드려지는 헌금일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작정헌금을 많이 해서 복 받은 간증은 과장하고 부풀려서 얘기하면서 작정헌금하고도 경제적으로 망한 성도들 얘기는 절대로 안한다.

작정헌금도 자신이 마음에 우러나와서 깊이 기도하고 자기의 형편도 고려하고 이렇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하면야 얼마나 귀한 일일진대, 헌금 작정서를 예배시간 중간에 돌려서 즉석에서 헌금주머니를 돌리면서 작정서를 내라고 하는 민망한 일을 필자는 예전 다니던 교회에서 경험했었다. 그것도 한 구좌에 얼마라고 정해서 몇 구좌든 하라고 한다. 그것도 남편은 아내와 의논하지 말고, 아내는 남편과 의논하지 말고, 지금 당장 각자 알아서 성령 인도대로 작정하라고 한다. 가정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심각한 일이다. 이것이 어찌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겠는가?

작정헌금 안한 사람을 향하여 제도에 반대하는 불량한 신앙을 가진 자라고 강단에서 위협하고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이어나는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니라”고 한다.

교회안의 맘몬우상부터 부셔야 한다. 오로지 예수님만 높이며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먼저 맘몬에서 벗어나야 성도들도 자신의 삶에서 맘몬을 없애고 자족하며 나누며 살아가기가 쉬어질 것이다. 교회 안에서 헌금으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면 악착같이 많이 벌어서 헌금도 많이 하려다가 부당한 경제활동을 하기도 하고 재물이 많지 않는 성도들은 상실감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더러운 우상들을 가차없이 멸하고 개혁을 이루어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한 요시야 왕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시며 칭찬과 복을 내리셨다.(역대하 34) 요시야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모든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개혁을 이루어나간 것처럼 교회안의 맘몬 신을 깨뜨리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진리의 개혁을 힘 있게 이루어가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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