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는 요한계시록과 욥기서 중간까지 말씀을 읽었다. 말씀이 얼마나 깊은 은혜가 되는지 날마다 깊이 스며든다. 이른 봄 보리 새싹이 차가운 흙을 뚫고 올라오는 신비함처럼 내 영혼에 주의 말씀은 한 줄기 새싹처럼 희망으로 다가온다.

육신은 나이가 들어가지만 거꾸로 영혼은 더욱 맑아진다는 어른들의 간증이 새삼 더 이해가 된다. 말씀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그 말씀이 내 안에 채워지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그리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순간순간 파고드는 어둠과 싸우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안에 더 아름답고 크고 소중한 생명의 있기에 세상의 어둠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세상의 어둠에 일희일비하며 대응하다보면 내면이 황폐하게 된다. 내면의 질서가 무너지면 성품의 결함이 생기고 이것은 인생에 엄청난 내상을 입게 된다.

악은 악을 낳고, 선은 선을 낳는다. 악한 마음을 품고서 어찌 행동이 아름답겠는가? 악한 마음은 악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음의 생각이 겉으로 자연스럽게 나온다. 마음이 어수선하고 악하면 얼굴은 환한 모습에서 검고 싸늘하고 웃음기 전혀없는 죽음의 분위기가 흘러나온다.

나는 이런 생각을 늘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러워야 한다. 세상에 자연스러운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린아이는 꾸미지 않는다. 해맑게 웃는다. 그 모습 앞에 모든 사람들은 무장해제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 그래야 아릅답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향기가 묻어있는것이 형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들이다. 진리의 말씀이 내안에 있는데 어찌 이중적이겠는가? 이중적인 모습은 가짜이다. 연극배우처럼 산다는 것은 삶의 비극이다. 이중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정신분열증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보여줄 무기가 무엇인가? 진실함이다. 이웃에게 보여줄 무기는 정직함이다. 교회를 향해 보여줄 무기는 충성스러운 일꾼의 모습이다.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점점 사람의 마음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심성이 많이 흐트러져있다. 나만 느끼는 것일까?

과거보다 교회시스템은 더 발전했고,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고, 환경도 아주 좋아졌는데 사람의 마음은 더 흐트러져있다. 가끔 무서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신앙의 견고함과 진실함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덜컥 겁이 난다. 한국교회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신앙의 대가 멈추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이 몰려온다.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하루아침에  욥의 재산을 다 거두워 갔다. 자녀들도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몸도 병이들어 만신창이가 된 끔찍한 고통과 직면하면서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3:26)만이 있다고 친구에게 넉두리를 했다.

욥의 불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에게도 몰려오는 불안감이 있다. 혹시 본푸른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바울의 제자 데마는 세상이 좋아서 제자의 길을 버렸고, 후매네오와 알렉산더는 교회에 큰 해를 끼쳤다. 혹시 사랑하는 성도들이 어느날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서 세상으로 가버리고 부모의 믿음을 이어가지 못하는 모습을 마주할까봐 불안하다. 목회가 10년 밖에 남지 않았기에 더욱 그런 마음이 새삼 더 깊이 드는 것 같다.

목회를 하다보면 가볍게 행동하는 분들을 마주할때가 많다. 교회를 떠나는 분들을 축복하며 보냈다. 좋은 목사님을 만나서 믿음이 더욱 강건하게 자라면 하나님 나라에 더 좋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좋은 쪽이 아니었다. 오히려 믿음도 잃어버리고, 그토록 가족복음화를 위해 땀을 흘리며 수고했는데 신앙의 부도를 맞는 가정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중적인 신앙생활이다. 이중적인 신앙생활은 결국 신앙의 부도로 연결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내는 분들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는 이중적인 모습은 없다. 영혼이 질서가 있기에 겉으로 나오는 모습도 늘 신선하기에 감동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중적인 신앙의 모습,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은 언젠가는 무너짐으로 연결된다. 왜 가족이 하나 되지 못할까? 이것은 부모의 문제이다. 부모의 이중적인 신앙의 모습 때문이다. 우리가 공감하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목회자와 중직자의 자녀들이 교회생활에 덕이 되지 못할까? 분명한 것은 이중적인 신앙생활 때문이다.

주님은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하셨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 이와같이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무도 열매도 좋아야 한다.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제자의 모습이다.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청산하지 않는다면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과 사람들간의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터를 놓아야 한다. 그럴 때 내 교회도 지킬 수 있고, 내 가정의 믿음의 유산도 물려줄 수 있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등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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