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성의 봄(春)과 앎(惺)] 산전검사와 낙태, 그리고 장애문제에 대한 고찰

이춘성 목사 / 영국과 한국 라브리에서 10여년을 간사로 사역하고 현재 고신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기독교 윤리학 박사과정(Ph. D)에서 공부하고 있다.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M. Div.)하고 천안의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일과 소명'이란 주제로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에 관한 석사논문(Th. M)을 썼다.

장애는 죄인가?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레위기 21장에서 레위인들 중에 제사장이 될 수 없는 부정함의 항목들 속에 다양한 장애의 형태들이 포함 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장애는 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이는 유대교적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으로, 기원전 1세기 무렵 사해 사본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쿰란 공동체가 남긴 문서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이들은 장애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공동체에 장애인들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상당히 경건하고 합리적인 입장을 취하는 바리새파들도 동일하였으며,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유했던 당시의 장애에 대한 상식이었다.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불교 문화권에서도 장애는 과거의 업보(죄)의 결과로 보았으며, 유교는 장애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보아 숨기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였다. 일부 나라에서 장애를 하늘의 축복으로 인식하는 문화도 있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다.

산전검사와 장애태아의 죽음

이렇게 장애를 죄, 수치, 부끄러움으로 이해하는 일반적인 문화는 과학과 의학의 발전과 발마추어 그 형태를 변형하여 현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산전검사를 통한 장애 판별과 이에 뒤따르는 낙태이다. 산전검사의 종류는 크게 침습적 방법과 비침습적 방법으로 나뉜다. 침습적 방법이란 산모의 자궁 안에서 양수나 체세포를 채취해서 유전자 검사를 행하는 것이다. 이에는 양수검사, 융모막생검(CVS) 등이 있다. 비침습적 방법은 초음파 검사와 같이 자궁 외부에서 장비를 통해 영상이나 소리로 태아의 상태를 판별하는 것이다. 이 중 양수 검사는 1~2%정도의 자연 유산 위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같이 다양한 산전검사 기법을 통해 감별된 상당수의 장애아들은 부모의 따뜻한 눈길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낙태로 사라지고 있다. 2010년 보건복지부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한해 약 17만 건의 낙태가 시행되고 있는 데, 그 중 16.3%, 약 2만 건 이상의 낙태가 태아의 건강 때문이었다. 이 조사를 신뢰한다면 이들 대다수는 산전검사를 통한 낙태임이 분명하다.

산모의 행복권과 선택권에 의해 희생되는 장애태아

과거 산전검사가 어려웠던 시기에는 비록 장애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이를 감당해야한다는 본인과 가족의 고난이 있다하여도 최소한 생명으로서 살 수 있는 기회라도 주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상당수의 장애를 지닌 태아들이 생명의 기회조차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박탈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대해서 메일랜더는 현대 산전검사와 유전자검사가 ‘사생활’과 ‘선택’이라는 언어와 결합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정부는 결함이 있는 태아의 낙태를 정부의 공적인 판단의 대상에서 제거하여 사적이며 개인적인 선택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태아를 독립된 존재가 아닌 산모에 기생하는 산모의 소유물로 여긴다는 뜻이다. 비록 과거와 같이 장애를 죄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지라도 여전히 장애는 부모와 장애 당사자의 고통을 유발하는 제거되어야할 상태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푸르디(Laura M. Purdy)는 Genetics and Reproductive Risk: Can Having Children Be Immoral에서 태아를 가능성 있는 인간(possible human)이라고 정의하고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미리 예측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태아의 출산이 유전병인 허팅턴 질병(Huntington’s Disease)처럼 불필요한 불행을 가정에 가져다주고 당사자도 그러한 결과가 당연히 예측 된다면 낙태를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근거로 그는 출산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는 “자녀를 원하는 이유는 가정의 삶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사랑하고 동반적 감정, 아이가 성장하도록 돌보고, 고통과 성취를 나누고, 다음 세대의 구성원을 형성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근거로 그는 입양이나 산전검사와 같은 새로운 출산 기술이 유전적 결함을 후 세대에 물려주지 않도록 돕는 좋은 도구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미리 예측되는 고통은 불필요한 고통이라는 전제가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고통을 미리 제거할 수 있다면 이를 제거 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을 개인이 선택하여 사용하도록 해 주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메일랜더는 현대인을 지배하는 두 가지 핵심 덕목(cardinal virtue)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공감(compassion)과 인정(consent)이다. 상대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상대의 고통을 무조건 공감해 주고 인정 해 주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는 가능성 있는 인간(possible human)일 뿐 아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불필요한 고통이 예상 될 경우, 낙태는 부모 개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윤리적인 선택이라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푸르디가 주장하는 ‘불필요한 고통’이란 어쩐지 종교적인 언어인 ‘죄’라는 말과 매우 유사한 말로 들린다. 종교에서 죄란 제거되어야할 대상이며, 인간의 행복을 가로 막는 고통을 유발하는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비종교화, 세속화 시대인 현대에서 이를 지칭하는 용어는 달라졌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여전히 살아서 유전되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도 일반 종교와 동일한 의미로 죄를 이해라고 있을까?

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장애태아

기독교는 ‘죄’란 단어를 일반적인 종교와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 또한 이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의 죄란 단순한 윤리적, 도덕적 행위의 어긋남이라기보다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현상이나 행동이 아니라 상태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선행을 통해 자신의 죄행을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무한한 속죄를 믿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를 볼 때, 기독교의 죄 개념은 인간의 속죄를 통해 죄를 제거할 수 있다는 타 종교의 죄 개념이나, 불필요한 고통을 개인의 선택과 인간의 의학적 기술을 통해 제거 할 수 있다는 주장과 결을 달리 한다. 기독교는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분은 유일하게 성자 예수님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특정한 사람만이 아닌 모든 인간은 죄, 곧 불필요한 고통 속에 있다. 단지 장애는 그 다양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현상은 근본적으로 제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현상을 제거 한 것처럼 보이나 이는 오히려 더 큰 재앙을 불러드리기도 한다. 몸속에 박테리아를 제거하기 위해 항생제를 사용하지만 결국 더 치명적인 슈퍼박테리아가 예기치 못하게 발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생명을 죽이는 낙태를 합리화 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이에 대해서 스콧 래와 폴 콕스는 “장애태아가 참으로 인간이라면 장애를 이유로 임신중절을 하는 것은 가장 사악한 형태의 차별이다.”라고 말한다(생명윤리학, 196). “장애우는 더 적게 차별 받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보호를 받을 가치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애는 제거 대상이 아니라 배려의 대상을 구별하는 기준이다. 더 사랑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메일랜더도 산전검사를 통한 장애 태아를 낙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전 인류를 향해 “당신은 존재해서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기독교 관점에서 본 생명윤리, 91).

날 때부터 소경인 자, 자신의 죄 때문?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이 나온다. 길을 지나가던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물어 본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절) 제자들이 이 같은 질문을 한 이유는 8장에서 유대인들과의 대화 가운데 자신을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8:58)고 말한 것과 연관이 있다. 또한 8장 5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영원 가운데 있는 존재로 소개한다. 이것은 자신이 성자 하나님이라는 것과 인간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신에 대한 소개와 연관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 된 이유를 질문하고 있다. 후천적으로 소경이 되었을 경우 그 원인이 분명하게 있는 데, 선천적인 소경은 그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원인은 영원 속에 계시는 하나님만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창세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사실을 들어내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제자들이 그러한 심오한 뜻을 알고 이런 질문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고백 했듯 자기도 모르게 성령의 이끄심이 이러한 질문을 하게했다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울 수 있다.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부모의 죄도, 소경 자신의 죄도 아니라고 답하신다. 예수님은 소경이 선천적으로 소경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절인 4~5절에 나온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바로 예수님을 통한 낮과 빛의 사역이다.

요한복음은 낮과 밤, 빛과 어둠 등의 다양한 대비가 나온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인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사역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9장에는 낮과 밤, 빛과 어둠, 장애인(소경)과 정상인(바리새인)의 대비가 나온다. 이를 통해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구원은 그 외모의 부족함이나 결함이 있는 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며, 정상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교만함이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3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Jn. 9:39-41 HR4)

소경의 눈을 고쳐주시는 사랑의 예수님

이후에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고쳐주셨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소경의 장애와 죄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고쳐 주셨을까? 이는 사회적이며 신체적으로 가장 약하며, 차별 받는 소경을 고쳐 주심으로 구원의 보편성, 누구나 구원을 받는 데 어떤 조건도 요구되지 않으며, 하물며 안식일이라 하여도 구원이 필요한 자들에게 구원을 베푼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예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구원도 율법적이며, 사회적인 관습 가운데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면서 구원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이들이 소경이었다면 자신의 죄의 상태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율법적이며, 사회적인 인정으로부터 자유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장애태아, 태어날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현실

소경은 예수님의 치유를 받고 눈을 떠 보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경은 본 적 없는 예수님을 하나님에게서 온 존재라고 믿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2~33) 이미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듯 “보지 못하고 믿는” 귀한 은혜가 임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ἐν ἁμαρτίαις σὺ ἐγεννήθης ὅλος)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 이들에게 소경은 자신들이 만든 하나님 나라에서는 제거되어야하며, 쫓아버려야 할 ‘불필요한 존재(고통)’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여전히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자행되고 있다. 그것도 은밀하고 은폐된 가운데서, 또한 너무나 뻔뻔히 합법적으로 말이다.

“죄 가운데” 이것은 현대에 “불필요한 고통 가운데”라는 말로 바뀌어 우리 사회의 문화와 관습, 윤리적 규율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비록 태어난 장애인들을 위한 여러 복지 정책과 사회적 인식이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개선되고 있지만 과거보다 더 많고, 은밀하게 장애와 장애인은 사회로부터 제거당하고 있다. 태어날 권리조차 부여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면서 누구는 죄인, 누구는 의인으로 구별하여 구원이 선별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간다운 삶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보이는 형태와 사람이 정한 구분짓기(정상의 범주)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죄가 인간의 근본적인 악이며, 절망이고 고통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제거하지 않고 보이는 사람과 현상을 제거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죄악을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

장애태아, 사랑 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

오늘날 이루어지는 산전검사와 이로 인한 공식적인 낙태가 바로 합법이란 태두리 안에서 은폐되고 합법화 된 인간이 만든 더 크고 추악한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은 장애인과 장애를 대하는 신자의 태도를 통해 세상을 향해 외치신다. 은폐된 죄를 낮의 밝은 빛 가운데 들어나게 하라고… 그리고 누구든지 어떤 조건에 있든지 하물며 보이지 않고 부모로부터도 거절당한 자궁 속 장애태아라 할지라도 “당신은 존재해서 참 좋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귀한 존재라고…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고…. 이렇게 외칠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믿는 복음이 생명을 위한 위대한 구원의 이야기이며 진리라는 사실이 우리 안과 밖에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복음은 단순한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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