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에 주어진 과제
- 같은 마음과 비전을 품으라!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는지를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명령을 제자들에게 내리셨습니다. 이 복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거될 것입니다.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70억 명의 사람들 가운데 약 35%가 여전히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스스로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교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 알기를 원하십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져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성도 중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어떤 이들은 새로운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지금까지 좋았던 교회 분위기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꺼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여 있는 물이 조금 지나면 썩게 되듯이, 교회는 생수를 세상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교회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자꾸 들어와야 하고,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가족으로 세워져야만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아픔도 겪을 수 있지만, 이러한 고통이야말로 사도 바울의 말대로 아기를 낳는 여인의 해산 수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고통입니다.

자, 오늘 본문 19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과연 여기서 말하는 ‘그 때’는 어떤 때를 말하는 겁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큰 박해의 때가 아닙니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이때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끌어다가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과연 이러한 때에 교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과연 이처럼 좋지 않은 상황에서 성도들이 예수를 전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박해를 받아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했고,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뒤를 이어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증거해 세례를 줌으로써,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그렇게 기세 당당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바뀐 것입니다.

19절부터 2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교회에 일어났던 박해가 오히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만약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복음이 예루살렘 안에 갇혀 유대교의 한 종파 운동으로 끝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에 핍박을 허락해 주시기도 합니다.

역사상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될 때는 환난의 때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많은 특권을 누릴 때는 오히려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편안하고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다 잘될 때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어려울 때 기도하고, 말씀 붙들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는 좋은 토양은 오히려 환난과 핍박의 때였던 것입니다. 

흩어졌던 성도 중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워진 곳이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거주하던 로마가 가장 컸고, 그다음이 알렉산드리아였고, 그다음이 안디옥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다음으로 세워진 두 번째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오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로서, 바울을 도와 세계 선교에 앞장섰던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바나바를 급히 안디옥에 파송하였습니다. 자, 과연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23절에 보면,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나바는 안디옥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라고 권하였습니다. 바나바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 24절입니다. 24절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6절에 보면, 원래 그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그를 가리켜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러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그 사람 앞에만 가면 모든 고통이 눈 녹듯이 사라져버리고 새 힘과 위로를 받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역할을 바나바가 한 것입니다.

교회에는 바나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 믿음이 연약한 초 신자들을 향해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바나바와 같이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한 일 가운데 성도를 권면하고 위로한 일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바나바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그가 바울과 같은 훌륭한 영적인 인물을 세워나간 점입니다.

사도행전 9장 26절 이하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변화가 되었습니다. 원래 사울은 구약의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심오한 것들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과 율법 자체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유대교에 대한 지나친 열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의 눈에서 비닐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그의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곧바로 예루살렘에 가서 믿는 제자들과 함께 교제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제자들은 사울에 대해서 여전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사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비록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여질 만큼 충분히 검증된 사람은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을 천거해 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가지고 있던 진리에 대한 열정과 순수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는지를 직접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 제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 바나바가 얼마나 사람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 그가 얼마나 상대방을 잘 믿어주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맞습니다. 어떤 사람의 과거 모습이 좋지 않았다고 해서 현재의 모습까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과거는 과거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과거에는 핍박자였으나 현재는 얼마든지 전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 것을 알고 바나바는 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에 누가 가장 적합한 사람인지를 기도하면서 찾았습니다. 바나바는 당시 길리기아 주(州)의 다소에서 지내고 있던 사울을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성경에도 능통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 문화를 잘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뜻을 정하고 사울을 만나기 위해 길리기아 주의 다소까지 먼 여행을 떠납니다. 안디옥에서 다소까지는 200km 이상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고, 두 도시 사이에는 험난한 산이 많아서 왕래가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바나바는 사울을 설득하여 안디옥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사울과 함께 일 년간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바나바는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만 사울과 동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7절 이하를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큰 흉년이 들자 안디옥 교회 성도들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부조금을 모금했습니다. 이때 안디옥 교회가 모금한 부조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기 위해 바나바와 사울이 동역했습니다(30절).

인재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인재가 없다고들 난리입니다. 그러나 인재는 키워내야 합니다. 다 갖추어진 인재만 찾으려고 하니 교회마다, 회사마다 인재난을 겪고 있는 겁니다.

우리 교회도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를 내다보고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큰 교회, 훌륭한 교회만 부러워하지 말고 시작 단계에서부터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신앙으로 양육해서 다음 세대를 책임 짓게 해야 합니다. 청소년들, 청년들도 키워서 앞으로 우리 교회, 우리 사회의 일꾼이 되게 해야 합니다.

바나바의 리더십은 사람들을 잘 권면하고, 인재를 잘 키우는 리더십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나바처럼 인재를 잘 키워서 훗날 자기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 바나바가 바울을 키우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바울은 신약성경 중에 절반을 썼습니다. 또 전도하면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많은 제자를 키웠습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성경 한 권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처럼 많은 교회와 제자들도 세우지 못했어요. 실제로 바나바와 바울이 동행했던 제1차 전도 여행 초반부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행 11:3012:25;13:2;14:14).

그러나 여행 중에 주도권이 ‘바울과 바나바’로 뒤바뀝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의 경우에는, 아예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어요. 바울 외에 동행했던 사람들은 바나바와 마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뒤에 바나바는 완전히 숨겨진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 거지요.

그래도 바나바는 나름대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조력자로서 어찌 되었든 주님의 복음이 더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도록 자기 몸을 철저히 낮추었던 거지요. 이게 말은 쉬운데 실제로는 절대 쉽지 않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내가 추천해 주고, 내가 키운 사람인데 나중에는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세간의 평가를 받았다면 이것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냉수도 위아래가 있잖아요? 그러나 바나바의 넓은 마음과 복음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겸손은 정말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 결과가 무엇인가요? 바나바처럼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자기는 뒤에서 끝없이 믿어주고, 기다려주니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안디옥 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흥은 바나바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24절을 보세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의 부흥을 이야기하면서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니까 부흥이 일어나더라. 어떤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니까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더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아요. 단지 ‘착한 사람 바나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 그 사람 때문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이런 식으로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한 사람이 교회 부흥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방법이에요. 교회 부흥의 방법을 알기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이 바나바와 같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반드시 부흥합니다. 평신도 사역의 모델은 바나바와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바울을 도와 사역했던 바나바와 같은 존재가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큰 무리를 우리 교회에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의 부흥은 숫자적인 부흥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26절에 보니까, 바나바와 바울이 일 년간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쳤는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교회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신자들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붙인 이름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결코 영광스럽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리스도의 추종자’ 정도의 의미였지요? 마치 18세기 영국에서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존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켜 ‘메써디스트’ 즉, 원칙밖에 모르는 원칙주의자들이라고 비아냥거렸던 것과 비슷합니다. 웨슬리와 그의 친구들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다니면서 하루에 한 번씩 자신을 정결하게 만드는 목록을 만들어놓고, 그 목록에 따라 매일 자신을 점검했거든요.

조금이라고 그 원칙에서 어긋나면 그들은 회개하고 다시 거룩한 삶을 추구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웨슬리에 대해서 반대 견해에 선 사람들은 웨슬리와 그의 친구들을 메써디스트 즉, 원칙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웨슬리의 후예들은 자신의 이름이 메써디스트, 즉 원칙주의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비록 메써디스트들은 아니지만, (그들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에게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이에요? 처음에는 비록 비아냥거리는 이름으로 쓰였을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만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불릴 이름은 없습니다.

나중에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제자로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두 제자인 셈입니다. 제자훈련을 받아야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8절을 보세요. 거기에 보면,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하는도다.” 그러자 바울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지요?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행 26:29).”

바울의 가장 간절한 염원이 무엇이었나요? 아그립바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다 자기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만큼 소중한 칭호는 없었습니다.

어디 바울뿐인가요? 베드로는 또 어떻습니까?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초대교회는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자긍심을 가지고 어려움을 이겨나갔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스스로가 교회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 또는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기거나 남들에게 알리기를 꺼리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교회에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요?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 그리스도인 된 것에 깊이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은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 두 가지 과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여러분 스스로에 대한 과제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여러분 스스로 대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남은 인생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실을 더 이상 숨기지 마십시오.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됨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 과제는 교회에 주어진 과제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 누군가의 전도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영적 거장의 헌신과 수고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는 숨겨져 있던 보석과 같은 사울이 처음으로 사역을 통해 열매를 맺었던 장(場)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와 양육을 통해 그리스도인을 세우고, 사도 바울과 같은 사역자들을 세워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 교회에 주어진 과제입니다. 이 일에 우리가 같은 마음과 비전을 품고 함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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