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온에 복, 시온에서 오는 구원자
- 교회 공동체의 신앙 지침서

아나돗교회 담임 정이신 목사

[01]

시인이 시 안에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이 장치로 인해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한 게 언어유희입니다. <1절>에서 “형제(아임)”가 나오고, <3절>에서 “영생(하임)”이 나와 비슷한 음으로 짝을 이룹니다. 또 <3절>에서는 “치욘(시온)”과 “약속했다, 명령했다(치와)”가 짝을 이룹니다. 히브리어로 읽으면 형제가 연합해 함께 사는 곳에 생명이 있는데, 이 생명이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약속하신 “영생(하임 알 하올람)”입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며 연합할 때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 넘치게 되는데, 우리말 번역처럼 이 표현이 한 단어가 아닙니다.

[02]

이 표현 외에도 “기름(셰멘, 2절)”과 “그곳에서(샴, 3절)”가 음성학적인 유사성을 지니는데, 서로 쌍을 이루는 단어가 행마다 배열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절>에서는 “아름답고 즐겁다”가 쌍을 이루고, <2절>에서는 “수염”이 반복됐으며, <2절>과 <3절>에서는 “흘러 내려오다”가 쌍을 이룹니다. 이런 배치는 복수형으로 장엄함을 드러낸 “시온의 산들”과 ‘하나님의 강복’이 내면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3절>의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시적 구조를 통해 시인이 강조한 건 당시에 결혼한 형제가 계속 그들의 부모 집에서 함께 살도록 권장하는 것이었습니다(참조. 신명기 25:5). 그 뒤 신약시대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같이 예배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 시에 대한 해석이 확대됐습니다.

[03]

형제 혹은 예배공동체 안에서 같이 지내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시인은 “보배로운 기름”, “아론의 수염”, “헤르몬산의 이슬”이란 세 개의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기름”과 “이슬”을 새로운 활력과 창조를 위한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했고, 이 셋을 모두 모두 “내린다(야라드)”에 연결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배열해서 기름이 옷깃까지 흘러내린 것과 같은 이미지를 강조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표현은 그 말을 세 번 반복했는데, 시에도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복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내린다’라는 메시지를 세 번 말했습니다.

[04]

표제에 이어 시를 시작하는 “보라(힌네)”는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한 어투로써 히브리 지혜문학에서 자주 사용했습니다(1절). 고대 이스라엘은 농경보다는 유목에 더 치중한 사회였기에 계절에 따라 목초지를 찾아 옮겨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유산 분배에 관한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도 형제들이 같이 모여 사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창세기 13:6; 36:7). 그런데 제한된 공간과 소유를 두고 형제들이 화목하게 지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유산 상속으로 인한 다툼으로 형제 사이에 틈이 생기기도 했는데, 이를 방지하고 가족 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고대 중동에서 시행했던 가족법은 아주 엄격했습니다. 시인은 집안 형제끼리의 관계가 어긋나지 않는 게 평화의 시작이라고 했는데(1절), 시에 나온 상황이 확장된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05]

고대 이스라엘에서 기름은 기쁨과 축제의 상징으로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사용됐습니다. 그렇지만 <2절>에 나온 “보배로운 기름”은 조금 다릅니다. 이 기름은 거룩함을 상징하는 아론의 제사장 임직식에 썼던 것으로 향기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름을 만드는 법은 <출애굽기 30:23∼25>에 나옵니다. 이 기름을 성전 기구에 발라서 기구를 성별(聖別)했고, 제사장에게도 발랐으며(출애굽기 30:26∼30), 대제사장의 임직식 때 대제사장의 머리에 부었습니다(출애굽기 29:7; 40:13). 임직식을 하는 아론의 가슴에는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보석이 있었는데, 기름을 붓는 의식은 하나님의 복이 제사장을 통해 온 나라로 흘러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해서 같이 사는 가정에 이런 복이 나타납니다. 이런 가정에는 향기로운 기름이 가득 부어진 것처럼 가족끼리 아프게 하는 쓴 마음이 없습니다.

[06]

기름이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수염은 아주 존귀한 사람의 모습을 시사(示唆)한 것으로(2절), 고대에서 수염은 권위와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집트인은 턱수염을 길게 길렀고 염색도 했으며 수염에 금실을 넣어 단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걸 귀족에게만 허용했습니다. 귀족과 달리 왕은 왕권의 상징으로 금속으로 만든 모조 수염을 달았습니다. 이처럼 수염 속에 권위와 존엄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여겼기에, 수염을 잡아당기거나 함부로 훼손하면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연합해서 같이 사는 것은 아론의 수염만큼이나 아름다운 일입니다.

[07]

아론의 머리에 부은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내린 후 그가 입고 있던 옷깃까지 적셨습니다(2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세우기 위해 기름을 붓는 일을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님이 강림한 사건에 빗대 이해했습니다(사도행전 2:17∼18). 그렇다면 아론의 옷깃까지 흘러내린 기름은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흠뻑 적시도록 은혜를 부어주시는 사건을 예표(豫表)합니다. 이게 주는 메시지에 따르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성령님의 기름이 모두에게 충만하게 차고 넘치는 일입니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성령님의 기름이 흘러내리면 안 됩니다.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충만하게 성령님의 은혜가 차고 넘쳐야 합니다. 사이비ㆍ이단처럼 특정한 사람에게만 성령님이 역사한다고 주장하면, 그 모임은 예배공동체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체가 됩니다.

[08]

헤르몬산은 시리아와 레바논 사이에 있는 샤르키산맥(안티레바논산맥)의 최고봉(最高峰)으로 높이는 2,814m입니다. 사시사철 눈으로 덮여 있기에 ‘회색 머리 산’ 혹은 ‘눈의 산’이란 별칭을 갖고 있는데, 이곳에 이슬이 많이 내렸습니다. 내리는 이슬의 양이 많았기에 밤새 비가 내린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형제간의 친밀한 우애를 이슬에 비유했는데(3절),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슬은 신선함과 생명력의 상징입니다(호세아서 14:5). 사랑하는 형제들과 같이 있을 때 신선한 힘을 느끼고 그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습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주는 힘이 퍼져서, 이슬이 모든 식물과 채소, 동물에게 내린 것과 같은 선한 영향을 줍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교회 생활이 이러해야 합니다.

[09]

고대 중동에서 이슬은 주로 건기에 내렸는데, 너무 더워 온 땅이 말랐던 건기에 내린 것이기에 더욱 귀했습니다. 만약 건기에 내린 이슬이 없었다면 식물이나 동물, 사람이 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건기에도 하늘에서 이슬이 내려 만물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주님의 복이 형제가 연합해서 같이 사는 가정에 이슬처럼 내립니다. 그런데 이슬로 표현된 헤르몬산의 복이 시온산에 내렸습니다. 헤르몬산에 내렸던 이슬이 모여 강이 됐는데, 이와 비슷한 이슬이 시온산에 내렸습니다. 시온만이 하나님이 거하시기로 약속하신 곳이기에 이슬의 복이 시온산에도 나타났습니다.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게 이와 같습니다. 메마른 시온산에 이슬이 내려와서 생명이 되살아났듯이, 화목한 형제간의 사랑은 가정을 새롭고 힘차게 합니다.

[10]

“그곳에서” 하나님이 복을 내리셨습니다(3절). “그곳”은 형제들이 연합해서 화목하게 같이 사는 가정과 시온입니다. 여기서 가정과 시온이 같이 복을 받는 대상으로 연결됐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에게 ‘시온의 복, 시온에서 오는 구원자’로 온 분이 예수 그리스도고(로마서 9:33; 11:26, 요한계시록 14:1), 하나님이 시온에 두신 보배로운 모퉁잇돌이 그분입니다(베드로전서 2:6).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이 시는 가정에 해당하는 메시지이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뤄야 할 신앙 지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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