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
- 기도 할 때 일어나는 일

아나돗교회 담임 정이신 목사
아나돗교회 담임 정이신 목사

[01]

<시편>에서 표제에 ‘기도의 시’라고 한 건 모두 다섯 편입니다. 이 중 세 편이 ‘다윗의 기도’고(17ㆍ86ㆍ142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102편>은 ‘고난 겪는 이의 기도로, 그가 쇠약해져서 자기 근심을 야훼 앞에 쏟아낼 때(직역)’입니다. <시편>이 히브리어로는 ‘테힐림(찬양집)’인데, 곡조가 있는 기도가 찬양이기에 우리는 <시편>을 통해 기독교 교리에 관한 것보다 기도하는 법을 더 많이 배웁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이 다섯 편의 기도를 읽거나 필사하는 게 좋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편>에 나온 기도 속에 내 사정이 이미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마저 나오지 않을 때는 이 다섯 편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시편>은 낭독해서 귀로 듣는 걸 목적으로 제작된 시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이 잘 쓰는 방법으로 시를 눈으로만 읽으면 크게 도움이 안 됩니다. 그것보다는 <시편>을 낭독하는 게 더 좋습니다.

[02]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에 약속한 게 주님의 백성이 부르짖을 때 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기도는 이 약속에 근거한 것으로 그가 했던 첫 번째 탄원에서(1∼2절) 강조한 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기에 시인에게 합당한 판결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는 성전에서 사법 판결을 내렸던 전통이 있습니다(신명기 17:8∼11, 열왕기상 8:31). 첫 번째 탄원은 이런 사건을 배경으로 하나님이 보좌에 계시면서, 이스라엘을 정의롭게 재판하시는 이미지를 인용했습니다. 이처럼 시인이 기도하면서 생각했던 게 성전에 얽힌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이라면, 오늘날 크리스천이 기도할 때 늘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구원의 약속입니다(마태복음 1:21). 크리스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이 기도에 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인 척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답하시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합니다(야고보서 4:3).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03]

<3절>을 히브리어로 보면 세 개의 완료 동사와 두 개의 미완료 동사로 구성돼 있습니다. 여기서 미완료 동사를 쓴 곳은 하나님이 시인의 잘못을 찾는 일과 그가 입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각오한 부분입니다(3절b). 이는 하나님이 앞으로 계속 시인의 잘못을 찾아도, 그는 입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기에, 주님이 그에게서 잘못한 걸 찾아내지 못할 것이란 자신감을 드러낸 표현입니다. 시인은 그가 물리적으로 강도와 같은 짓거리를 하지 않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도 강도가 하는 짓이라 여겨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04]

이런 자신감을 드러내기 위해 시인은 <5절>에서 “발걸음, 발자취”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일상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시인은 그가 늘 지켰던 삶의 길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인이 성전에 오는 때나,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만 주님의 말씀을 따랐던 게 아닙니다. 시인은 일상에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살았습니다. 시인이 말한 “길(마으글로트)”‘바퀴 자국만큼 좁은 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길을 걸어가기가 무척 어렵지만, 시인은 그 길을 갔습니다. <새번역성경>은 히브리어가 지닌 의미를 살리지 않고 “길”로만 번역했습니다.

[05]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는데, 그 길들이 우리가 가기 좋게 모두 다듬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해 아래 세상에서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길을 무사히 갑니다. 또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주신 길이 세상의 길과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길은 포장도로로 돼 있는데, 하나님이 인도하시며 성령님이 동행하시는 길은 가시밭길이나 절벽 옆에 있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을 만들어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기에 때로 지름길을 만들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가면 때로는 시인이 말한 좁은 길을 가게 됩니다. 이와 달리 세상은 앞 세대의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 밖에 가지 못합니다.

[06]

시인은 그가 가진 자부심을 “나는(아니)”을 통해 강조했습니다(4절).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시인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와 세상 사람을 대조하기 위해 “나는”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잠시나마 시인과 대조되게 행동했던 사람이 신약시대의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했는데, 베드로는 자꾸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초기였기에 베드로는 시인처럼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나는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님이 강림하자 그때야 베드로가 ‘나는’이란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인과 베드로의 사례를 보면, ‘나는’이란 자부심이 실린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람 안에 성령님이 내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 만용을 남발해서 ‘나는’이 아니라 교만이 가득한 ‘나만’이 됩니다.

[07]

<7절>에 있는 하나님의 “미쁘심, 구원자, 오른손”의 이미지는 <출애굽기 15:1∼18>에 있는 바다의 노래에 나온 개념과 비슷합니다. 히브리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그들을 뒤쫓던 이집트의 군대가 홍해에서 몰살당했습니다. 그러자 모세와 아론의 누이며 예언자인 미리암이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모세는 그가 지었던 노래를 히브리민족과 같이 불렀고, 미리암은 히브리 여인들과 함께 소구를 들고 춤을 추며 노래를 메겼습니다. 그때 사용한 이미지를 시인이 <7∼8절>에 인용했습니다. <7절>은 <출애굽기>에 나온 이미지고, <8절>에 나온 “눈동자”, “날개 그늘”은 <신명기 32:10∼11>에 있는 모세의 말씀에 나온 이미지입니다.

[08]

<7∼8절>을 보면 시인은 이집트를 탈출할 때 히브리민족을 인도했던, 믿음을 지키지 못해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던 히브리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게 야훼 신앙을 있게 한 뿌리 경험이기에 여기에 토대를 두고 시인은 기도했습니다. 분명히 시인과 모세가 살았던 시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모세가 말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걸 자기가 부른 노래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암탉이 병아리를 보호하는 이미지를 사용해 그분이 예루살렘을 이 시구처럼 보호하려고 했으나 예루살렘이 원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3:37). 예수님이 시를 그대로 인용한 건 아니지만, 모세 때부터 내려왔던 이미지를 예수님도 인용했습니다.

[09]

<13절>을 시작하는 ‘일어나십시오, 야훼여!’는 언약궤 전통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뜻하는 표현으로,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호소할 때 자주 썼습니다. 이 시구가 의미심장한 건 시인이 자기를 노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대적자들을(12절) 직접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저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직접 대적자들을 상대했다면, 그는 정의의 편에 선 사람이고 저들은 불의를 따르는 악인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관한 성찰도 같이했습니다. 대적자들만 물리쳐 달라고 기도한 게 아니라, 자기에게도 무슨 잘못이 있는지 돌아봤습니다. 이런 태도가 <15절>의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10]

시인은 그가 드렸던 기도의 유한성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정의를 통해 반전을 꾀했습니다(15절). 그런 후 시인은 하나님의 정의를 닮아 주님 앞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시를 시작할 때 시인은 하나님의 정의가 그의 대적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향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시를 마무리하면서 시인은 하나님의 정의가 그의 삶에 먼저 이뤄지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대적자들에게 대응하는 일이 유한한 가치 체계 속에 젖어 있는 해 아래 세상에서는 완전하게 이뤄질 수 없는 일이란 걸 알게 된 후, 시인은 무한한 하나님의 세계로 만족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환에는 <14절>에 있는 재물의 복이 악인의 후손이 아니라 의인의 후손에게 나타날 것이란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14절>에 있는 복은 원래 의인의 후손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15절>에는 정의로운 세상이 와서 의인의 후손이 복을 받는 걸 기다리겠다는 시인의 고백도 같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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