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Fridedrich Nietzsche)당신이 서 있는 그곳을 깊이 파고들어라. 샘은 바로 거기에 있다. 자기 삶에 딱 맞는 무엇이 지금 여기가 아닌 아주 먼 곳에, 가령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국땅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발아래에 당신이 추구하는 것, 당신에게 주어진 많은 보물이 잠들어 있다.”

니체의 문장은 평범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평상시 마음에 그리 담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평범했던 문장이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인생에 쓴맛 단맛 신맛 짠맛을 다 경험했기 때문일까? 뒤돌아보면 그리 파도치는 격렬한 인생을 산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잔잔한 호수 같은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짧은 생애를 살면서 힘든 현실과 마주하면서도 한 번도 그것이 그리 원망스럽거나 힘들다, 고통스럽다,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이 정도는 거뜬히 벗어날 수 있는 저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체질적으로 강원도 산골짜기 화전 밭의 자녀로 태어난 것도 인생의 재료가 된 듯싶다. 편안한 환경이 아니라 거친 환경에서 자랐다. 사는 것이 생존경쟁이었다. 가정이 세상의 한복판이었다. 개인의 생각, 주장이 그리 중요한 가정이 아니었다. 각자 도생하는 가정이었다. 산모퉁이 작은 집 549남매, 한때 할아버지와 삼촌과도 함께 살았다. 세상을 이겨내는 힘을 거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배웠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나의 삶의 자리를 바라보며, 이 산골짜기를 떠나 서울에서 살 것이다. 이곳은 나에게 행복도 꿈도 사랑도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왜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는지 잘 모른다. 단지 대가족에 적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조용히 홀로 살아야겠다는 것이 어린 시절 알게 모르게 내 몸의 DNA가 된 듯싶다. 이런 성격이 신문사를 운영하게 되는 모티브가 된 것 같다. 항상 책을 읽어야하고 글을 써야한다.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 한자한자 문장을 채워가면서 심리적인 안정감과 삶의 희열을 느낀다. 이때 나는 나의 온 세포가 살아 쉼쉬는 것 같다. 신문사는 좋아서 하는 것이다. 돈 주고 운영하는 나의 놀이터이다. 놀이터에 함께 놀아주는 친구가 많아서 좋다. 그분들의 글을 읽는 것도 행복하다. 

'나 홀로'라는 개념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한쪽에는 이기적인 자아가 웅크리고 있고, 또 다른 쪽에는 의존적인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개척하겠다는 개척자 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모든 개념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 부정적인 면을 줄여가고 긍정적인 면을 더 살리면 인생에 큰 자산이 되는 것 같다.

이기적인 자아가 줄어드는데 큰 힘을 준 것은 가정과 교회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곳이 아니다. 나의 욕망을 줄여가고 타인의 욕구와 바람과 기대를 채워줄 때 공동체는 세워진다. 자기를 불태우는 촛불처럼 그런 삶의 자세로 살 때 공동체는 살맛나는 장이 된다. 어쩌면 대가족이란 전쟁터에 살면서 공동체를 지식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몸으로 학습한 것이 목회자로 살기에 좋은 재료가 된 것 같다.

어린 시절 양육강식의 생존경쟁에서 성장한 것이 인생의 마이너스가 된 것이 아니라 인생에 플러스 요인이 더 된 것 같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 인생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보면 그리 내용물도 훌륭하지도 않고 보잘것없지만 거친 세상에서 나름대로 주어진 삶의 자리를 잘 다듬어 가는 인생이 되었으니 그져 감사할 뿐이다.

또한 어린 시절 친환경적 환경에서 자라왔다. 나를 둘러싼 사방이 높은 산과 계곡과 이름 모를 풀과 자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런 자연환경이 때로는 좋으면서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면서 닮고, 싫어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에 교회환경도 친환경적 요소를 좋아하고, 매주 금요철야 마치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도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일 것 같다.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18041864)은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고 대표작은 <주홍글씨, 1850>과 만년에 쓴 단편 소설 <큰 바위 얼굴> 등이 있다. 남북전쟁 직후,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을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을 듣는다. 어니스트는 커서 그런 사람을 만나 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도 큰 바위 얼굴처럼 되려고 생각하며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았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시인이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소리쳤다. 자신도 모르게 큰 바위 얼굴이 되어간 것이다. 호손은 위대한 인간의 가치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 등의 세속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구를 거쳐 얻어진 말과 사상과 생활의 일치에 있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었다.(두산백과).

좋은 대상이나 건강한 가치를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자신도 어느날 그런 모습으로 닮아간다. 우리사회가 다음세대에게 주어야할 유산은 훌륭한  인물이다. 닮아가야 할 좋은 인물이 많이 부각되어야 하는데, 싸구리 미디어로 인해, 수준 떨어지는 이념정치로 인해, 좋은 분들이 수면 아래로 갇혀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마음이 왜 건강할까? 절망이란 단어를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렇다고 인생이 평탄한 것도 아니었는데, 뒤돌아보면 느끼는 한 가지가 있다. 친자연적 환경에서 살아온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마음이 병들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삶의 질곡들을 견뎌낼 수 있었던 원천적인 힘의 공급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담대함일 것이다. 모든 글이나 사람이나 물체에는 고유한 에너지가 나온다.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모든 삶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이겨낼 수 있는 영적 에너지를 무한히 제공한다. 인생에서 무엇보다 성경을 늘 가까이함이 큰 힘이요 소망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인생에 파도칠 때마다 아내와 자녀들과 교회 성도들과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버텨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 니체의 문장 하나로 삶의 재료가 되었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보았다.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을 깊이 파고 들어라. 샘은 바로 거기에 있다.....지금까지 한 번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발 아래에 당신이 추구하는 것, 당신에게 주어진 많은 보물이 잠들어 있다.”

희망이란 선물, 기쁨의 선물은 먼 미지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나와 함께하는 만나는 분들과 가정과 교회공동체를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지금이란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면 미래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인생의 반바퀴를 돌고나니 모난 것도, 척박한 환경도 긍정적인 자산으로 받아들이면 인생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저 감사할뿐이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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