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돗교회 담임 정이신 목사.
아나돗교회 담임 정이신 목사.

[01]
이 시에는 한 줄, 한 줄마다 강력한 시적 영상이 담겨 있으며, 강력한 대조가 시를 전체적으로 강하게 붙잡아 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다윗은 부족함ㆍ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이 시는 ‘나의 목자이신 야훼’(1∼4절)와 ‘나를 대접하는 잔칫집 주인인 야훼’(5∼6절)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이 완전히 구별되는 건 아닙니다. <5절>에 나오는 단어의 의미가 중첩돼 시를 전체적으로 이어줍니다. <5절>의 “찬칫상”은 <2절>에 나온 “푸른 풀밭”과 연결되는데, 목자가 양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듯이 잔칫집 주인이 귀한 손님에게 잔칫상을 베풉니다. 그리고 목자가 양에게 “새 힘을 주시는”(3절) 것처럼 잔칫집 주인이 손님에게 “기름을 부으십니다”(5절). 또 “쉴 만한 물가”와(2절) “넘치는 잔”이(5절) 서로 이어집니다.


[02]
고대 중동에서 왕과 신들을 묘사할 때 흔히 목자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함무라비 왕도 그를 ‘목자’라고 했습니다. 시에서 표제를 뺀 첫 구절이 ‘야훼(hwhy)’인데,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했습니다(1절). 히브리인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부를 때 이 성호를 썼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세 있는 통치와 자비로운 통치 두 요소를 강조한 것입니다. 자비로워도 힘이 없으면 나에게 도움이 안 되고, 힘이 넘쳐도 자비가 없으면 폭군이 됩니다. 따라서 목자는 하나님이 힘ㆍ사랑을 다 가지고 계신다는 뜻으로, 목자ㆍ왕이니 영어로는 ‘Shepherd-King’입니다. 그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나의 목자시다. 내 아버지시다.’가 이 시의 출발점입니다. 이건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 창조주를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개인의 믿음이 공동체의 믿음으로, 공동체의 믿음이 개인의 믿음으로 서로 공유됩니다. 이런 믿음을 토대로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연합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 향하는 선을 이뤄갑니다(로마서 8:28). 


[03]
하나님이 내 목자시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1절). 어떤 이는 <1절>이 가진 이런 의미를 고려해서 <1절>을 ‘야훼가 내 목자이신 한 내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에 종속되지 않으시기에 이 표현 속에서 과거ㆍ현재ㆍ미래가 만나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신앙의 길이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지난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족하지 않게 살아왔다면 앞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 과거에 대한 감사와 현재에 대한 만족,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여기서 <1절>을 히브리어로 보면 ‘목자가 양에게 충분한 양식을 공급해 준다’란 뜻이 있습니다. <1절>에서 “없다(히브리어 ‘로’)”는 강한 부정으로, ‘절대로, 절대로 부족하지 않다’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로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이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신명기 2:7). 그리고 다윗도 주님의 은혜를 표현하면서 <신명기 2:7>과 같은 동사 ‘하세르(부족하다, 필요하다)’를 사용했습니다. 이후 신약시대에 바울도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은사를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에 알맞게 골고루 나눠 준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04]
<2절>은 <1절>에 나온 목자 이미지를 확대했습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고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이 배불리 먹고 조용히 쉴 수 있게 인도합니다. 먼저 목자는 양을 눕게 합니다. 푸른 풀밭은 풀이 많은 곳입니다. 다윗은 목자가 메마른 땅으로 양을 이끌지 않고 물ㆍ풀이 많은 곳으로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메마른 곳은 대체로 바위ㆍ덤불이 많습니다. 우리의 목자는 그런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또 “쉴 만한 물가”는 잔잔한 물가입니다. 잔잔한 물가는 물이 부족하지 않고 풍부하기에 양들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목을 축일 수 있는 곳입니다. 급류가 있는 곳은 물이 잔잔하지 않기에 양들이 편안하게 물을 마시기 힘들고, 자칫 잘못하면 물에 빠집니다. 


[05]
<3절>은 ‘우리 인생의 활력이 되살아난다’란 뜻입니다. 새번역성경은 의역했지만, 개역개정성경은 “영혼”을 하나님이 되살리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네페쉬’로 하나님이 ‘생명’을 되살리시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에게 풀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고, 야생동물의 공격으로부터 양이 안전하게 쉴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그 책임이 끝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항상 양들의 건강을 보살핍니다. 병약한 양이 있으면 치료해주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양이 있으면 그의 친구가 돼 줍니다. 예수님은 가지고 있는 양 백 마리 중에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가는 게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누가복음 15:4). 이처럼 선한 목자는 양을 그와 1:1로 관계를 맺은 친구로 생각합니다(누가복음 12:4). 


[06]
“바른길”은 양이 목표를 향해 ‘가야 할 길’을 뜻하는데(3절), 목자와 양이 길을 두고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목자가 양의 특성을 잘 알아서 인도하고 있는데, 양이 보기에는 그 길이 좁고 험합니다(마태복음 7:14). 그래서 양은 그 길로 가기 싫다고 합니다. 이는 양이 목자의 성품을 잘 모르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길을 만들어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양이 보기에 길이 좁고 험해도 그 길이 가장 안전합니다. 양의 눈에는 앞이 낭떠러지인 절벽으로 보여도, 홍해를 가르고 길을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절벽 사이로 길을 내서, 늑대들이 양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더 안전하게 양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길로만 다녔던, 자기 생각에 젖어 삐뚤어진 양은 어디에 길이 있느냐고 목자에게 항의합니다. 그러다가 목자가 인도하는 길로 가지 않고 자기가 생각한 다른 길로 갑니다.


[07]
목자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의미심장합니다. 목자는 이분이 하나님이란 걸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합니다. 야훼 하나님이란 이름에 합당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목자는 이렇게 양을 인도합니다(출애굽기 34:5∼7).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자신이 원하는 계획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여기 있습니다. 시에 따르면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렇게 했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인간의 눈이 아닌 성경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08]
히브리인들에게는 잔치 때 몸에 기름을 바르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몸에 올리브유를 바르는 것인데, 이는 덥고 건조한 날씨에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5절>은 잔칫집 주인이 귀한 손님으로 다윗을 접대하는 모습입니다. 잔칫집 주인인 하나님은 잔이 넘치도록 마실 걸 다윗에게 줬고, 풍성한 식사로 그를 대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기쁨까지 주셨습니다. 여기서 “잔이 넘친다”란 표현은 내가 가진 게 충분해서 더는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ㆍ은총이 차고 넘쳤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그의 생애 초기에는 사울에 쫓겨 오랫동안 도망자로 살았고, 왕이 된 후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의 생애를 돌아봤을 때, 그의 잔은 늘 하나님이 주신 사랑ㆍ은혜로 차고 넘쳤습니다.


[09]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벗어난 후 잔치ㆍ축제가 다윗을 기다리고 있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이 거룩한 의식에 참여해 다윗은 축제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더불어 많은 사람이 축제의 옷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기쁜 잔치의 식사를 하나님의 집에서 같이 나눴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잔칫집 주인으로 다윗과 그를 따르는 무리를 환대하셨습니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다윗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잔칫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복ㆍ식사ㆍ기쁨을 얻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직역하면 “밥상”인 ‘슐한’은 화목제로 드린 감사 제사의 식사인데(5절), ‘하나님이 베푸시는 보호’를 뜻하기도 합니다(78:20). 또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해서 화목제를 드린 사람이 여러 사람과 함께 제물을 나눠 먹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10]
하나님이 주신 넘치는 복을 생각할 때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탄성을 지르며 감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원수가 다윗을 해하려고 따라왔는데, 이제는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를 따릅니다. <6절>은 다윗이 흥분해서 내뱉은 감탄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가 더 강하게 나타난 곳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곳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영원히 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집에서 영원히 감사하며 살기 위해 그곳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친절하고 따뜻한 잔칫집의 주인이 돼 우리를 초대하셨고(5절), 우리에게 주님의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하셨습니다(6절).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오랫동안,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서 살겠다’란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같이 사는 식구가 됐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집에서 같이 사는 식구가 됐기에, 더욱 긴밀한 교제를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예수님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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