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경험은 한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사람을 만난다던지, 영적으로 엄청난 경험을 하는 경우들이다. 어떤 경험이 여러분에게 있었는가? 믿음의 조상 야곱에게도 그런 체험이 있었다. 벧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신 사건이다. 성경은 그 사건을 계시로 알리며 벧엘 사건이 얼마나 야곱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알리고 있다. 본문 역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1. 강렬한 첫 만남


좋은 부모에게서 좋은 자식이 나오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탁월한 제자가 나온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었다. 그들은 12 지파로 형성된 민족으로 그 조상은 야곱이다. 그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은 창세기 28장에 담겨있다. 형을 속여 축복을 가로 챈 그가 형의 살해 위협 속에서 집을 떠나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 창 28:10~1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홀로 여행 중에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한 것이다. 지금처럼 여행이 자유롭고 편리했던 시절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여행 중에 노숙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가 경험한 이 체험은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후손에게까지 영향력을 발휘한다. 호세아 선지자의 설교에도 등장하고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시는 과정 속에서도 등장한다(요 2:  47~51). 이는 야곱의 벧엘 사건은 개인 야곱에게는 물론이요, 그의 후손과 모든 성도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계시 사건인 것이다. 

호세아는 야곱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는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한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이 벧엘 사건은 어떤 과정과 의미를 교훈하고 있는가? 

 

2. 하나님이 보시는 야곱


하나님은 야곱의 일생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하셨는지를 말씀하신다. 호세아는 야곱이 천성적으로 간교하여 온갖 편법을 동원했고 불법을 자행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배경 하에서 죄를 지으며 살아온 자임을 까발리셨던 것이다.  

* 호 12:3~5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첫째, 출생의 비밀"

야곱이 60세 때 기다리던 자식을 얻게 된 이야기다. 쌍둥이를 얻게 된 이야기다. 아내 리브가가 배속에서 두 아들이 싸워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두 민족이 서로 싸우게 된다는 것이었다. “태에서부터”란 야곱이 선천적으로 교활한 자임을 암시한다(박윤선).  그는 교활한 본성을 타고 났다. 하나님은 장차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계시하셨다. 

* 창 25:21~26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이 계시대로 진행되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이기고 그의 후손 이스라엘이 역시 에돔 족속을 이기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둘째 벧엘 언약"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야곱의 첫 언약이었다. 

* 창 28:13~15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야곱이 그 무엇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시고 언약을 맺으셨다. 비록 야곱이 그것을 모르고 조건적인 헌신을 하지만 말이다. 그는 아침에 하나님께 맹세하며 헌신했다. 

* 창 28:16~22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셋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이후 야곱은 생존에 급급했다. 야곱은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네 아내를 얻어 12 자녀까지 얻고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를 라반 자녀들이 시기하고 라반까지도 경계하게 되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때 언약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야곱은 그 사실을 아내들에게 설명하며 떠날 것을 알린다.  

* 창 31: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그는 아내의 동의를 얻어 온 가족과 함께 야반도주를 시도했다. 이를 사흘 뒤에 알게 된 라반은 7일 동안 추적하여 야곱을 만나려 할 때 라반에게 하나님은 야곱과 시시비비를 따지지 말 것을 계시하시며 야곱을 보호해 주셨다(창 31:24).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바를 지키신 것이다. 

"넷째, 얍복강 사건" 

그가 형의 소식을 듣는다.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맞이하러 온다는 것이다. 야곱은 형을 만날 두려움에 간교하게 잔 머리를 써서 가족을 두 떼로 나누어 먼저 강을 건너보내고 자신은 홀로 남았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강가에서 번민할 때, 하나님은 천사로 오셔서 그와 대면하셨다. “얍복(yabbok)”은 씨름을 뜻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위기 상황에서 야곱은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해 냈다. 인생의 최대 고비에서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sudden death wrestling)을 했다. 이 씨름은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된 중상으로 사실 패배했다.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은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하나님께 복을 간구하는 처지가 되었다. 성격대로 그는 끈질기게 천사를 붙잡고 늘러졌다. 호세아는 이 때 야곱은 울면서 회개하고 축복을 간청했다고 기록한다. 창세기에는 없는 기록이다. 

야곱과 씨름한 천사는 누구일까? 혹자는 에서가 보낸 정탐꾼 일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성경의 전체적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삼손 아버지 마노아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기묘자”라고 밝히셨다(삿 13:17~18). 이사야 선지자는 주실 한 아기의 이름이 바로 기묘자라고 밝혔다(사 9:6).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별칭이다. 야곱이 싸운 천사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예수셨던 것이다.  

야곱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 낸다. 그는 하나님께 그 약속을 지킬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야곱이다. 자신은 전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기 위해 온갖 일을 하다가 위기를 겪게 되자 하나님께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 창 32:9~12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호세아는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4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갈 때 그를 처음 만나셨다(창 28:10). 그리고 라반을 떠나 귀향할 때 두 번째 만나셨다(창 35:9 이하). 두 경우에 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와 맺은 언약을 갱신하셨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거기서 야곱의 자손인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벧엘에서 야곱과 연약을 맺으실 때 이미 그의 후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될 것이며(창 28:14), 내가 네 후손에게도 이 땅을 주리라"(창 35:12) 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은 물론이요 그의 후손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셨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호세아는 이 야곱 역사 속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계시는 지금도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고 강조한다. 흥미로운 말씀이다. 

* 호 12: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기서 '우리에게'란 '그에게(야곱에게)'로 수정하여 번역한 영어 성경들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야곱에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으로 본 것이다(RSV, NIV, NEB, JB, LB). 그러나 70인 역(LXX)이나 벌 게이트(Vulgate) 역등은 맛소라 사본 그대로 번역한다. 한글 개역 성경도 이를 따랐다.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당시 야곱에게 말한 것과 같이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J. Calvin, Keil).

* 신 5:2~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성경 계시는 이렇게 연속성과 현재성을 갖는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은 소위 “기독교의 경전”으로만 존재하는 책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이다.   

 

4. 기념 칭호를 잊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은 기억하고 기념할 만한 이름을 가진 구원의 신이시다. 호세아는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배교한 이스라엘에게 간곡하게 요청한다. “여호와”란 기념 칭호를 잊지 말고 주께로 돌아오라고 간청한다. 

* 호 12:5~6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호세아를 통하여 야곱의 후손 즉 이스라엘을 책망하신 하나님은 정당하다. 조상 야곱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념해서 붙인 이름 "벧엘(Bethel),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the Lord)"을 "벧아웬(the house of On) 우상의 집"으로 바꿔 그곳에 송아지를 세우고 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벧엘을 벧아웬, 악의 집으로 바꿔 버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복된 약속을 하셨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무시하여 언약으로 주어진 혜택을 상실했다. 그들은 헛된 것을 추구하고 거짓과 포학을 일삼으며 하나님을 떠나 주변 이방인의 문화와 관습을 따르려고 힘썼다. 언약의 하나님은 그에 대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셨다.  

* 호 12:1~2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여기서 “바람을 먹는다”는 것은 속이 비어 있고 공허한 것, 헛된 것을 상징한다. 에브라임이 헛된 것을 좇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8:7). 헛된 이방인들을 신뢰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려 했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풍을 따라 가서”란 동쪽 아라비아 광야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기 바람으로 심할 때는 황사와 같은 바람으로 곡식과 가축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심지어 인명을 해치기까지 한다. 또한 지중해 배들에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욥 27:21;시 48:7;렘 18:17;욘 4:8). 이스라엘이 동풍과 같이 앗수르와 애굽 등과 동맹을 맺어 구원을 의뢰하는 위험한 행동으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것을 지적한 말씀이다. 실제로 북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조공으로 일만 달란트를 바치겠다는 계약을 맺고, 올리브기름을 애굽에 보내며 위기 때 도움을 요청했다(호 7:11). 그러나 그런 외교 정책은 실패한 정책이었다. 

* 호 12:5~6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는 분(I am that I am)'이시다(출 3:14).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존(自存)하는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으로 지금의 이스라엘에게도 같은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호세아는 지적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시다. 호세아는 그 하나님을 “여호와 그의 기념 칭호”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긍휼을 받아 조상 야곱 때부터 특별한 언약관계 속에 하나님을 섬겨왔던 이스라엘은 바로 그 신이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세아는 비록 교활하고 간교한 야곱의 DNA를 타고 나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이지만, 야곱에게 신실하게 언약을 준수해 오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아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호소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고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이웃 간의 사랑을 행하고 법도를 지켜 공의를 실행하라고 촉구했다(신 7:9; 호 6:4; 미 6:7~8).

 

결 론


기독교의 구원의 도리는 단순하게 믿음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난 날 역사하시고 인도해 오신 그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명한다. 단순히 믿는다는 말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며 그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라 명하신다. 

매튜 헨리는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라며 설교했다. “너는 인애와 공의를 지켜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곤고한 자를 원조함으로 인애를 지키며 그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지불함으로써 공평을 지켜라. 모든 자에게 친절하다. 누구에게도 부당한 일을 행하지 말라. 경건과 공평을 지키라. 이 세상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라. 독실하고 정직하라. 이런 일들을 때때로 행할 뿐만 아니라 행할 때에 주의하여 긍휼을 베풀며 양심적이 되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그를 의지하는 생활을 뜻한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모하여 언약의 하나님을 신뢰하길 바란다. 

* 시 123:1~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난 날 택하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놀라운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여전히 나 중심적인 생각과 습관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죄가 가득 찬 이 땅에서 숱한 유혹에 휩싸여 있는 우리에게 예시의 영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정함이 없는 삶 속에 오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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