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로마가 기독교를 극심하게 박해하며 기독자들을 발본색출하여 화형에 처하거나 사나운 맹수의 밥이 되게 했던 기독교 박해기에 있었던 일을 마치 기념비처럼 그 명칭에 담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는 한 사례가 있다. 바로 <성 카리스토 카타콤>이 그것이다. 이 명칭이 역사의 전면에 "절개 굳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강화하고 있는 배경은 아래와 같다.

"카리스토"

'카리스토'라는 이름을 가진 한 젊은 여인이 그토록 극심했던 기독교 박해기의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었다. 숱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견디지 못해 배교하는 일들이 허다할 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카리스토의 결신은 그 자체가 순교와 다를 바 없었다. 

카리스토가 찾은 예배의 처소는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이었다. 지상의 예배 처소는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고 신앙을 지켜가던 그리스도인들은 죄다 지하 공동묘지였던 카타콤을 비밀리에 찾아 예배와 기도생활과 기타 신앙생활에 관한 제반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카리스토 역시 그렇게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카타콤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물고기 모양의 표식을 따라가다 보면 카타콤의 예배 처소를 만나게 된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익투스(ΙΧΘΥΣ)인데, 곧 Ιησoυs(예수스: 예수), Χριστοs(크리스토스: 그리스도), Θεοs(데오스: 하나님), Υιοs(휘오스:  아들), Σωτηριαs(소테리아스: 구세주), 각 단어의 첫 모음 및 자음을 순서대로 합친 단어다.

익투스(ΙΧΘΥΣ)를 풀어서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구세주가 되십니다"라는 뜻이 된다. 이미 물고기 기호는 당시 기독자들에게는 암호로 은밀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에 땅바닥에 물고기 그림만 그려도 상호 소통이 되었다. 누군가가 배교하여 이 암호를 유포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알 수 없었기에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변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기에 배교 행위 역시 당시와 같은 박해기에서는 시간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불시에 로마 군인들이 이 카타콤을 습격했고, 미처 피하지 못한 카리스토는 피신할 엄두나 겨를도 없이 꼼짝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로마 군인들은 카리스토를 회유했다.

지금이라도 예수가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아들도, 구세주도 아니라고 부인만 한다면 당장 집으로 보내 주겠다며 종용했다. 그리고 만약 이를 거부한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이 무시무시한 창으로 찔러 죽일 것이라며 협박했다. 그러나 아직 초신자에 불과했던 카리스토였지만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나는 죽어도 이제야 가까스로 잡은 예수님의 손을 놓을 수가 없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화가 치민 로마 군인 한 명이 순간적으로 달려들어 창으로 카리스토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렀고, 카리스토는 쓰러지는 순간에 손가락 셋을 내밀면서 "성부, 성자, 성령, 이 하나님을 당신들은 믿어야 합니다."라고 절규하며 장렬하게 순교의 숨을 거두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름 없는 이 카타콤을 카리스토의 순교를 기념하며 본으로 삼고자 <성 카리스토 카타콤>이라 명명했다.

이 카타콤의 지하 4층에는 흰색 대리석으로 카리스토가 손가락 셋을 내밀며 쓰러지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성지순례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달군다. 순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겠지만, 절대적 신앙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순교"라는 단어 앞에 한없이 부끄러울 뿐, 그저 유구무언일 것이다. 가끔 '순교의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가늠해 보는 자아성찰에 몰두해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가슴에 들려오는 소리는 '지금 나의 현실에서 아주 사소한 신앙인의 덕목조차 도외시하거나 가볍게 여겨버리는 실태라면 아서라!'라며 부정의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다. 대뜸 극한 박해와 환난의 때가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음에 감사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한다. 카리스토 같은 신앙의 선진들이 순교적 신앙으로 믿음을 지켜 후대에 계승해 주었기에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며 쉽게 말한다.

과연 그럴까? 에스겔의 답변은 이를 강력하게 부정한다(겔 14: 12~20). 노아, 욥, 다니엘 이 세 사람이 오늘 그대와 함께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의 자녀도 구원할 수 없는 그들이기에 그대가 아니라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음을 천명한다. 오롯이 사람은 죄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공의가 그 방향을 결정 할 뿐이다(겔 7: 1~9).  

박해나 핍박의 상황은 구속사의 흐름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헤아릴 수 없는 형태와 성격으로 지상 교회를 둘러쌀 것이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이라고 하여 순교적 신앙이 요구되지 않을까? 정말 순교적 신앙은 기독교 박해기의 전유물일까? 사상과 이념의 이데올로기로 비롯되는 하나의 기독교적 현상일까?

제발 순교적 신앙에 대하여 태만하거나 가벼이 여기지 말자. 전도가 힘들수록 한 영혼의 가치는 비례하여 그만큼 소중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지상 교회의 전도 현장은 자꾸만 세상과 가까워 지려 한다. 80년대 상업적 마케팅 전략의 급물살을 타고 들어온 교회의 번영신학과 교세적 성장주의는 상업적 마케팅 시장에 복음 전도 현장을 매몰시켰다.

언제부터 지상 교회가 교세에 따라 대형, 중형, 소형으로 구분했던가? 성경 어디에 숫자놀음 하는 교회의 흔적이 있든가? 오히려 다윗이 성과주의적 인구 조사를 단행했다가 하나님의 엄중한 징벌을 받지 않았는가(삼하 24장)? 도대체 누가 일등 교세를 자랑하는 교회를 추구하라고 했는가? 또한 지역사회 혹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교회가 되라고 했는가?

초대 안디옥 교회가 "그리스도인"(행 11:26)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은 당시 사회와 세상으로부터 동질성의 차원에서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 지역사회와 세상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집단이라는 차원의 인정이 아니던가? 안디옥 사람들에게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유대교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었다.

현실적으로 안디옥 교회와 같은 사회적 인정이 교회를 표적 삼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추종하는 독특한 집단'이라는 의미이기에 상당히 고무적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세상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적 가치에 헌신하는 종교를 요구하고 있어, 이런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반기독교적이라는 의미다. 

오늘은 "순교(殉敎)"라는 명제 앞에 안디옥 교회가 획득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호(別號)와 순교자 카리스토가 획득한 "성 카스트로"라는 "성(聖)"자의 형용구에 잠시 발을 멈추고 그대 자신의 거짓 없는 신앙의 고백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 하나님의 성호를 한 번 불러 보심이 어떨까? 카리스토의 마지막 호흡으로 내뱉은 성호이기에 그대에게나 본 필자 자신에게 강력하게 주문해 본다. 쥐구멍만 찾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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