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진 박사는 고려신학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교, 그리고 풀러신학대학교에서 수학하셨다. 현재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캄보디아를 포함한 인도차이나를 연구중이시다.
전호진 박사는 고려신학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교, 그리고 풀러신학대학교에서 수학하셨다. 현재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캄보디아를 포함한 인도차이나를 연구중이시다.

지난 9월1일부터 18일까지 베트남, 라오스, 태국 3나라를 여행, 한국 선교사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중요한 선교정보를 얻었다. 같은 불교 국가라도 선교가 비교적 자유로운 태국과 캄보디아 보다 기독교가 선교가 아주 제한 받는 베트남과 라오스가 최근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 박해시대의 초대교회가 영적 활력으로 이방선교를 하였다. 다만 인도차이나는 현지 교회내부에서 선교운동은 없다.

먼저 베트남에서 몇몇 한국 선교사의 박해의 경험을 소개하면, 임 선교사는 다낭에서 비밀리에 신학교를 시작하였다. 신학교에서 공부한 제자들이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5년만에 경찰에 발각 당하여 문을 닫고 말았다. 지금 그 건물은 비어 있다. 다낭은 한국방문 객이 하루에 수 천명 들어오는 관광도시인데 한국 선교사는 5명 미만이라고 한다. 인구에 비하여 선교사가 전무한 곳이나 다름없다.  

다낭이 기독교에 대하여 감시가 심한 이유는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 때문이라고 본다. 17세기에 로드스라는 프랑스 신부가 베트남 선교를 하면서 어려운 중국어 글자를 라틴문자로 바꾸는 일을 가르치었다. 그러나 19세기 반기독교적 정부가 프랑스 신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카도릭 국가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가 다낭을 침공, 베트남을 식민지화한다. 이후 베트남의 강성민족주의자들은 프랑스와 기독교를 적으로 간주, 4만명의 카도릭 신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한국의 황사영 백서사건과 유사하다. 박해를 군사력으로 제압한 불행한 일이다. 카도릭 선교는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사비엘부터 대포를 앞 세운 선교였다. 다낭은 기독교에 대한 감시가 가장 심한 곳이라고 한다. 

한국 병원선교 팀이 건물은 벌써 완공하였는데, 몇 년째 허가를 해 주지 않고 있다.  9월 2일 주일은 동행한 김익중 장로님(서울 정보사 사장)과 임선교사 제자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날은 마침 베트남 국경일이라 신자가 10명 정도 출석하였지만 평소 주일에는 20명 이상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가정교회로, 일반 주택 2층이 예배 처소로, 내부 기물은  한국교회가 후원하였다. 외국인 선교사가가 현지인 사역자를 후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이 교회 목회자는 스마트폰 가게를 운영한다. 베트남은 외국인이 신학교나 교회개척은 절대 허락하지 않으나 정부가 허가한 교단은 교회설립과 신학교 운영을 허용한다.  

9월 5일, Hanoi Bible College 10주년 기념행사에 정식 초청을 받아 참석하였다. 4년 전 한 과목을 강의하였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하노이 정부가 인가한 북 베트남의 유일한 신학교이다. 중국식으로 2년에 한 번씩 신입생을 받아야 한다. 해마다 입학과 졸업이 없다. 정원 30명인데, 4년 전 클라스는 85%가 몽족이었다. 지금도 북 베트남복음교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신자 85%가 몽족이다. 주종족인 불교도 낀족 선교는 아주 어렵다. 

방문 중 한국 선교사들과 현지 사역자들의 잘못된 역사를 설명하였다. 현지 사역자들은 베트남이 미국을 이겼다고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패한 것이 아니라 자진 철수한 것이라고 교정하여 주었다. 베트남과 한국은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을 받았다. 한국은 반공정신으로 저항하였지만 베트남은 반공이념이 없었다. 다수의 카도릭 신자들은 한국 같은 반공 정신이 전무하였다. 당시 고딘 디엠 베트남 정부는  부패하여 백성들은 “깨끗한 호치민”을 더 존경하였다. 자기 나라를 스스로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나라에 외국군대 개입은 소용없다. 당시 배트남은 도덕과 이념에서 베트콩에게 패배하였다. 베트남은 도이모이 정책으로 개방, 미국과 경제교류는 하면서 영어 간판 보기는 어렵다. 

사진제공 = 전호진 박사.
사진제공 = 전호진 박사.

복음의 전진은 핍박이나 억압이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한국 선교사들은 지하 신학교를 통하여 사역자를 배출, 북 베트남에는 가정교회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러나 소수 부족 중에서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라오스를 방문, 주일에는 현지인 교회 예배참석을 원하였지만 외국인이 현지인 교회 가는 것,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하여 김장로님만 유 선교사가 20여 년 전 개척한 교회 출석하고 필자는 한인교회에서 설교하였다. 20여명 출석자 중 대다수가 선교사들이다. 태국이나 캄보디아는 선교사들이 다 현지교회에 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라오스는 더 핍박이 심한 나라이다. 수 년 전 한국인 선교사가 지하 신학교를 하다가 발각되어 국경 근처 태국의 한 교회 구석을 임대하여 신학교를 시작하였다. 교수들은 다 태국인 목사들이다. 태국어와 라오스어는 80%가 유사하다. 그 학교를 방문, 학생들에게 격려인사를 하였다. 학장 선교사는 25명 학생들의 출신종족을 소개하였다. 25명 중 주종족인 라오족 학생은 3명에 불과하였다. 인도차이나는 주종족들에게는 기독교 선교는 무덤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 신학교는 이상적 모델이다. 라오스 복음교회가 이 신학교 출신을 목회자로 받아 주기로 협약을 맺었다. 신학교는 교회의 위탁교육이 정상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국 선교사들의 신학교는 홀로서기이다. 캄보디아 장로교에서 일하면서 현지인 교회 신학생을 유치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라오스의 유선교사는 교회를 시작하기 위하여 베틀로 옷감을 짜는 소규모 가내 공업으로 비자를 받았다. 8명의 일꾼들에게 전도, 지하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의 선교 성공은 치유사역이라고 하였다. 병든 현지인들을 안수기도로 낮게 하자 교회가 급성장하였다고. 그러나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어, 라오스 복음교회 목사에 이양하고 지금 그는 다른 사업장을 열었다. 라오스는 비즈니스 비자 외는 비자가 불가능하다. 유 선교사가 세운 교회는 현재 주일 500명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한국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가 500명으로 성장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자가용을 가진 중산층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다. 감시가 심하지만 한국 선교사들은 비즈니스 비자로 가정에서 은밀하게 제자양성을 한다. 

9월 12일부터 14닝까지태국 꼰켄에서 C&MA 교단 목회자와 평신도 40명을 대상으로 강의하였다. 신학교 학생들 대상으로 강의를 계획하였지만 목회학과 학생이 너무 적어 일반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인도차이나의 우려되는 선교상황은 신학 지망자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16일에는 치앙마이에서 태국 목회자 15명 대상 하루 강의를 하였다. 일부 참석자들은 성경비평주의를 가르치는 맥길버리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대부분 참석자들이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나온 것으로 배웠다고 한다. 오래전 한 인도 전도자가 태국 교회는 봉사를 더 중시하는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교회부흥이 어렵다고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신학교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단은 가르쳐도.  

사진제공 = 전호진 박사.
사진제공 = 전호진 박사.

인도차이나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이유를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1. “돈 선교”는 영적 부흥과 성장을 저해한다. 베트남과 라오스는 외부 돈 없이 성장하고 있다. 바빙크는 『기독교선교학』에서 자립선교의 한국교회와 인도 일부 교회가 부흥하였다고 예를 들었다. 돈으로 고용된 사역자의 신앙의 순수성은 하나님만 아신다. 
2. 인도차이나 교회는 과거 한국교회와 같은 부흥운동도, 부흥운동을 위한 연합정신과 지도자가 없다. 
3. 고용된 사역자들에게 영적 도전을 기대할 수 없다. 
4. 현지 사역자들의 성경지식과 목회학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다.   
5. 인도차이나 교회 목회자들은 이단에 대한 위험을 알지만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를 영적으로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감염되고 있다 (태국과 미얀마). 
6. 지도자들의 폐쇄주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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