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제일교회 원로 이준효 목사.

진실(眞實), 사전적으로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된', 혹은  '본질적으로 참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이 진실 앞에 '온전한', '거짓' 등과 같은 형용구가 붙을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특히나 진실 그 자체가 현상에 본질을 양보하거나 현상 세계의 사실을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실이기에 진실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진실을 사실에 종속시키는 사례들이 많다.

【진실(眞實)】

반드시 전제해야 할 대목이 있다. "사실(事實)"은 현상이지 진실(眞實)이 아니다. 진실은 현상의 사실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사실을 진실과 거짓으로 심판 혹은 구별한다. 과장되거나 대강 줄잡아 말하는 것도 진실의 본질에 미치지 못하므로 거짓말이 된다. 하여 현상 세계의 입장에서 "온전한 진실"이라는 말과 "거짓된 진실"이라는 말이 고개를 내밀었다.

창세기 이십 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내 사래를 애굽의 바로에 이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누이라고 말한 사례가 나온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사래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곧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복 누이(창 20:12) 임과 동시에 아내였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현상 세계의 사실이기에 거짓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그러나 이 두 사실적 관계는 아브라함과 사래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진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 사래는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현상 세계의 사실적 신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예정 안에 선택한 깊으신 경륜과 뜻이 있다는 진실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진실을 놓치지 않고 있었더라면 결코 사래를 누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사라(여주인)를 사래(나의 공주, 곧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하셨을 때(창 17:15, 16), 곧 아브람(고귀한 아버지)을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 창 17: 5)으로 개명해 주셨을 때, 사래 역시 그의 진실은 천명되었다. 이는 아브라함과 사래가 지엽적인 존재에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거시적인 존재로 현상 세계에 오픈되었다는 진실의 천명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 자신의 진실인 "열국의 아비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진실 앞에 자존감과 자아 정체성을 투명했어야 옳았다. 바로 그 투명성은 아내 사래를 현상 세계의 사실로서의 아내가 아닌 열국의 어머니로서의 아내라는 진실 앞에 "이 여인은 나의 아내"라고 당당하게 소개했어야 옳았다. 이러한 의식은 오늘 날도 우리 기독자들에게 강조되어야 옳다.

두 사람의 젊은 벽돌공이 높은 건축물의 앞 벽을 쌓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먼저 벽돌이 잘못 만들어져 한 편이 다른 한 편보다 조금 더 두꺼운 것을 발견했다. 하여 함께 일하던 동료에게 "이보게 벤, 우리가 쌓고 있는 벽돌이 아주 미세하지만 양쪽의 높이가 차이가 나는 것 같아. 이런 벽돌을 계속 쌓아 올라가다 가는 벽이 부실하게 되거나 무너질 것 같아"라고 했다.

그러자 벤이 대꾸했다. "무슨 그런 염려를, 그렇게 미세한 차이가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자네는 너무 유별나서 탈이야. 제발 좀 아서게나!". 하지만 아무래도 찜찜해서 "우리 어머니는 내게 항상 정확한 것이 진리라고 가르쳐 주셨다네. 그러므로 우리가 쌓고 있는 이 벽돌 작업도 그 정확성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진실이 아닌 거짓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벤은 또 말했다. "나는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네. 또한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라네."  "그래? 그런데도 지금 자네가 쌓아 놓은 벽이 이 작업은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우리의 일에 거짓이 있다면 우리의 성품에도 거짓이 있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조만간 거짓이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될 걸세!"

"제기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마치 이 벽돌 벽이 무너지기라도 하라는 듯이 저주하는 것 같구먼? 그래도 난 이대로 강행하겠네."라고 벤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벤은 계속 작업을 진행하여 벽돌을 더 높이 쌓아 올렸고 날이 저물 때에야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각자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현장에 가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결국 염려했던 일이 대형 사고를 내고 말았다. 벽돌 한 장의 차이는 실로 미세했지만 그 미세한 차이가 벽돌의 높이를 쌓아 올라 갈수록 현저하게 경사를 이루었고, 결국 밤새 하루종일 작업해 놓은 벽돌 벽이 무너져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행인의 머리 위로 덮치는 통에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무너진 벽돌을 정리하다가 벽돌 더미에 묻혀 있는 시신을 발견하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행하는 거짓말이나 거짓 모두 마찬가지다. 이 정도, 혹은 이것쯤이야 할 수 있겠지만, 거짓은 풍선처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무섭다. 거기다 거짓을 행하는 사람은 점점 거짓에 대담해지고 완악해지기 마련이다.

분명히 두 사람의 벽돌 쌓기 작업은 추호도 거짓이 없는 사실이 틀림없었다. 이것이 현상된 사실, 곧 현상 세계가 말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은 아니었다. 진실은 설계도에 준거하여 작업하되, 정확한 자제와 정확한 공법에 따른 작업이 실수 없이 진행되고 완공되어야 옳다. 간혹 벽돌공들이 줄을 쳐가며 작업하는 현장을 목도했을 것이다.

우리 기독자들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물론 목회자들의 성경 해석과 적용, 신학과 목회 현장의 접목, 어쩌면 기독교 교회사에서 가장 본질적인 추구의 목록들이 아닐까 싶다. 왜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당신이 일곱 별을 오른손에 붙잡으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거니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을까? 그리고 그 의미까지 정확하게 설명해 주셨을까?(계 1: 9~20)

지상 교회의 사자, 곧 목회자가 목회의 진실을 외면하거나 현상 세계의 동반 요구에 손을 잡아 버릴 경우 교회에 미칠 악영향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에 당신이 친히 오른손으로 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계신 것이다. 교회 또한 왜 두루두루 거니시며 살피시겠는가?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아니던가?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상 세계의 사실은 세상이든 교회든 그 어느 곳이든 예외 없이 현상 세계의 사실, 곧 현실 앞에 솔직해진다. 여기서 솔직함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타협에 손 내밀 수밖에 없는 화인 맞은 양심을 말함이다. 권력 앞에, 명예 앞에, 물질 앞에, 고개 숙이는 추태 말이다. 그것이 굴욕이요, 그것이 가룟 유다의 선택이요, 본디오 빌라도의 법적 정신의 유기임을 알면서 말이다.

현상과 현실이 손뼉 치며 환영한다고 해서 진실을 외면하고 제 본분과 사명을 유기할 텐가? 직설적으로 말해서 교회 성도들이 좋아한다는 핑계를 앞세워 탈 신학, 탈 성경, 탈 신앙임을 뻔이 알면서도 이를 마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텐가? 도대체 누구의 종이며 누구를 위해 목회하는가? 진실로 성도가 기뻐하는 목회는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이끌어 감이다.

때로는 목자의 채찍이 필요하고, 때로는 목자의 간절한 목소리와 급하게 부는 양각 나팔 소리가 필요하다. 성도들을 이끌어 가야 하기 위해서는 목가적(牧歌的)인 사명에 투철해야 옳다. 목자의 손에 든 막대기는 양들을 초달 하기 위함이요, 지팡이는 양들을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기 위해 앞서서 지휘하고 그 길로 안내하기 위함이다.

부득불 온전한 진실과 거짓말을 구분해야 한다면, 진실의 본질 편인 "온전한 진실" 편에 다가서자. "반쪽 진실"이라는 한정 용법도 현상 세계에 얼굴을 내민 마당에 진실의 본질 편에 선다는 그 자체가 현실적으로 도태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긴 하지만, 진실의 본질은 영원히 변할 수 없고 참된 진리로서 영원을 주도한다는 개념적 전제와 실재론적(實在論的) 전제 앞에 대담해지기를 축복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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