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제자순복음교회 담임 강임명 목사.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담임 강임명 목사.

서로 다른 목적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같은 목적과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론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보고 싶은 것을 주로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어하는 본능대로 산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피해도 입지 않고 산다. 그런가 하면 자신과 다른 목적과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 힘을 사용하고 때로는 거짓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이가 있다. 반면에 정직한 삶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유익을 내려놓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가 있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듯하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이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이가 있다. 반면에 그 어려운 처지를 공감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같이 하고 그 필요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이가 있다. 힘을 가지고 제멋대로 사용하는 이가 있고, 힘이 있지만 그 권리를 내려놓고 겸손히 섬기는 이가 있다. 참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인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고 주인임을 인정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새롭게 태어난 삶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삶은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의 원리가 그 중심에 있다.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그것에 순종하기 위해 집중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는 곧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이 원리를 바로 알고 행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의 원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죄인을 사랑하는데 십자가에 죽음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구원하는 것이다. 죄인을 사랑하는데 차별이 없다. 나의 시각에는 차별이 있으나 예수님은 전혀 차별하지 않는다. 너나 나나 모두 죄로 인해 죽었던 같은 죄인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 첫 번째 질문과 답에는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이다.

죄인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신분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이 맞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사는 것인지 배우고 익히고, 버릴 것은 버리고 변화해야 한다.

‘어떻게 살릴 수 있는가?’‘어떻게 살아야 할까?’의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순서가 바뀌면 본질이 형식에 묻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받는다.’는 전혀 본질이 아닌데, 이와 같은 전통과 관습을 처음부터 강조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가. 전통과 관습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본질을 잘 분별하여 유연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그 옛날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서 ‘할례를 받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구원의 본질을 정확하게 구별 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음행과 피 채 먹는 것과 목메어 죽이는 관습은 금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구원받은 예수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신앙을 왜곡할 수 있고, 믿음의 공동체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살리는 문제라면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어떻게 했을까?’에 대해 심사숙고 해야 한다. 구원의 문제가 아닌 다양한 삶의 방식과 형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은 어떤 삶의 방식을 원하는가?’를 찾고, 끊임없이 쇄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길 원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길 원하는 편협한 사람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온전히 찾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훈련이 필요한가.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평생을 훈련해도 부족하지 않겠는가.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왕상 1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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