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오래전 일단의 사람들이 미국 미조리 주에 한 마을을 세우고 그 이름을 <자유>라고 불렀다. 그들은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조차 반대할 정도로 극히 '자유?'로웠다. 그리고 서적을 통한 마을 광고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선전했다. 그것은 "우리 마을은 미합중국에서 성직자, 교회, 하나님, 예수, 그리고 지옥이나 악마가 없는 유일한 도시이다."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엘드 크라크(Elder Clark)는 > 포스트 디스패치(Post Dispatch)> 지(誌)에 그 도시를 일컬어 '지옥이나 사단과 다를 바가 없다. 그곳은 죄악의 도시이며, 호텔은 갈보집이며, 미덕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라고 악평의 글을 실었다. 이러한 악평이 '자유' 마을 시민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엘드 클라크를 명예 훼손 죄로 고소하고 <포스트 디스패치> 지(誌)에 대해서도 25,000달러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

엘드 클라크의 변호인 측은 곧바로 그 마을에 대한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몇 주일이 지난 후 재판석상에서 엘드 클라크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증거 자료들이 제시되었으나 정작 엘드 클라크를 고소한 원고 측 변호인 단에서는 아무런 반론도 내세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엘더 클라크는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으며, <포스티 디스패치> 지에 청구한 손해 배상 청구 심의에서도 오히려 모든 비용을 기소자 측이 부담한다는 조건하에 기각되었다.

결국 방종의 삶을 자유로 오인하여 <자유> 마을을 세웠으나 소돔과 고모라와 방불했던 그 도시는 엄청난 실패작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심지어 그곳에 둥지를 틀려고 이사 왔던 무신론자들조차도 혐오감을 표시하며 되돌아갔다. 그들 시민들 중 어떤 이는 <자유> 마을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무신론자 한 명이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그가 자신의 불신앙을 뽐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많은 기독교 단체 속에 끼어 있는 하나의 무신론자 단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자체가 불신앙적인 사회에서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 예화는 강퍅했던 애굽의 왕 바로의 만행을 빗대어 우회적으로 교훈한 어떤 강해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바로의 강퍅함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차례대로 강타할 때마다 그 수위를 높여 갔다. 마치 하나님과 대등한 반열에 서서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듯이 기고만장했다. 자신의 치하에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라는 최 약자의 입장에서 무릎을 꿇고 있을 때에는 그럴 수 있었다. 어쩌면 상당한 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 이후 애굽의 존재는 성경 역사에서 향후 이스라엘이 단연코 상존해서는 안 될 철저하게 배제된 폐쇄 사회가 되고 만다. 사실 애굽은 야곱의 가족을 품고 그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성장할 때까지 그 성장의 환경이 되고 배경이 되어 주었을 때가 가장 영광스러운 전성기였다. 그것은 유다 민족을 품었던 바벨론이나 메대와 바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돔과 고모라가 롯을 품고 있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애굽이 이스라엘을 그들의 품에서 밀어내고, 소돔과 고모라가 롯의 가족을 탈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바벨론, 메대, 바사가 더 이상 유다를 품을 수 없을 때, 그동안 그 민족들을 들어 쓰셨던 하나님의 용도가 끝나 유기 곧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식을 훈계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채찍을 그 용도가 다했을 때에는 가차 없이 꺾어 버리는 것과 같았다.

궁극적으로 지구촌을 비롯하여 우주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피조 세계는 신국 건설의 완결 편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천명될 때, 대 우주 심판이라는 종말론적 최후 심판에 직면하고 말 것이다. 유기된 자들의 실체가 불 심판의 영원한 형벌 가운데서 고통을 겪는, 곧 둘째 사망에 처하게 됨으로 현상 세계의 유구한 역사는 대 장정의 막을 내릴 것이다.

그대여! 단언 컨데 하나님께서 그대를 신국 건설의 주역으로 부르실 때 기꺼이 돌아와 화답하라. 조역도, 환경도, 배경도, 악역도 되지 말라. 혼인 잔치의 들러리는 그냥 구경꾼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했다.

이 지상에서 한 인간이 구원을 이루는 문제는 곧 신국 건설의 주역이 되어 배역이 아닌 주인공으로 산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피조 세계의 조화로움을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선택과 유기라는 구속 계획과 그 완성이라는 구속 역사의 관점에서 선택받은 자의 인생을 의미한다.

현상세계의 미완성, 아직도 구원의 완성을 추구하는 주역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그 사명을 다하고 있어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합력의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롬 8:28). 그러나 언젠가는 현상세계를 향한 합력의 주문이 종지부를 찍을 때가 온다. 그때까지 현상세계는 인간들의 억지 부림 같은 죄악의 관영으로 탄식할 뿐이다(롬 8:18~25).

다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는 유일한 소망 하나 붙잡고 말이다. 역설적으로 현상세계의 영원한 쉼의 날이 바로 그 유일한 소망이 성취되는 그날부터 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라고 바울은 힘주어 대변한다.

바로 "그대와 나"의 영원한 속량을 기다리면서 길이 참고 있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대와 내가"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어 영화롭게 되는 날(롬 8:29~30), 곧 현상세계가 완성되는 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긴장을 풀고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구속 역사의 대 장정과 독생 성자까지 아낌없이 대속의 희생 양으로 내어 주신 지고한 사랑을 찬양할 것이다(롬 8:31~39).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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