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좌절과 절망으로 꿇었던 무릎을 다시금 일으켜 개혁의 기치를 들고 담대하게 돌진할 수 있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의 신학 환경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타락과 세속화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이를 개탄하며 개혁의 절대성을 주창하려 했지만 듣는 귀가 없었다.

실의에 빠져 서재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좌절과 절망에 심각한 우울증까지 합세하여 괴롭혔던 때가 있었다. 마치 "불의 시험"과 같아 이를 견디고 버티고 극복해 내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하루는 그가 또 그 시험의 수렁에 빠져 극한 괴로움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그의 아내인 캐시(Cathy)가 검은 상복을 입고 서재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루터는 슬픈 얼굴을 하고 울먹이며 서 있는 아내에게 "누가 죽었소?"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네,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루터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아내를 쳐다보다가 "그래도 명세기 신학자의 아내라는 사람의 입에서 어찌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시오?"라고 아내를 심하게 나무랐다.

그리고 "세상에 하나님께서 돌아가시다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다시는 하지 마시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오."라고 아내의 엉뚱한 잘못을 지적했다. 그런데 어찌 루터의 아내가 평생을 고백해 온 전제된 하나님을 정말 모르고 한 망발이었을까?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남편이 안쓰러워 자신의 이상 행동을 직설적 충고로 대신했다.

곧 아내는 "그렇다면 당신 얼굴이 왜 그 모양이죠? 마치 하나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라고요. 정말 당신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 그대로 행동하세요!"라고 따끔하게 쏘아붙였던 것이다. 바로 이 한 마디의 충고가 루터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의 무릎을 일으켜 꽉 닫힌 서재의 문을 박차고 나와 종교 개혁의 불화살을 높이 쏘아 올릴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그 무엇보다 바로 오늘이 있게 했다. 사실 하나님의 천지 창조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이 지구촌에 둥지를 틀게 하시고 지구촌에 서식하는 모든 피조물뿐만 아니라 지구를 둘려 싸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체(天體)를 총망라하여 보이지 않는 대기권의 영향력이 아직도 이 지구촌을 붙들게 섭리하시고 계신다.

바로 그 지구촌에 그대가 있고 우리가 있다. 만약 그대나 우리가 이 지구촌을 붙들고 있었다면 진작에 폐기 처분했을 것이다. 극한 죄악으로 관영하다 못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위해 피조하신 온갖 피조물의 봉사와 섬김과 희생을 병들게 하고, 파괴하며 짓밟고 무시한다. 심지어 우리 인생의 생존을 위해 이토록 장엄한 만물과 천체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대적한다.

불신의 세계야 몰라서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 신앙의 세계는 그 형편이 어떨까? 그대의 눈 속에 들어오는 모든 만물과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천체의 모든 존재가 바로 그대의 생존을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쉴 새 없이 가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입체적으로 느낀 적이 있었거나 있는가? 그리고 그 모두를 존재케 하시고, 통치하시며, 섭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날마다 매 순간 감사하며 사는가?

아님 아직도 욕심과 탐욕의 배를 채우지 못해 거의 매일 울상이 되어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의 전철에 탑승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를 보낸 내용 가운데,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딛 1:12)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레데에서 선교 사역 중인 한 선지자가 그레데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이는 그레데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어느 곳을 가더라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편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논리는 그대나 우리나 그가 누구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에는 틀림없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을 만나 세계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바뀌고, 내세관이 바뀌어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고백하는 신앙의 세계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마틴 루터야 오늘과 미래의 교회를 고민하다가 현실적으로 지상 교회가 타락한 실상 앞에서 실의와 좌절에 빠져버려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못 망각해 버렸기에 아내의 충고를 피할 수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레데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 때문에 실의와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례들이 다반사다. 뭔가 마치 기차가 레일을 탈선한 상황과 유사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오늘은 루터의 입장에서 그대의 내면에 둥지 틀고 있는 염원(念願)이 무엇인지 입체적으로 조명해 보자.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대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관이 행여 그레데인들의 것과 동질은 아닌지 냉정하게 고민해 보기 바란다. 만약 루터의 입장에서 한숨의 무릎을 꿇고 있다면 루터의 아내 캐시의 질타에 루터의 반응으로 탈출하기 바란다.

혹 그레데인들의 추구 때문이라면 제발 주님께로 돌아서길 권고한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시며 공생애 사역을 놓고 기도하시던 중에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첫 번째는 돌덩이를 떡덩이가 되게 하여 굶주린 배를 채우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라고 물리치셨다.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7)고 책망하며 물리치셨다. 세 번째는 사단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자신을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며 시험했다. 역시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10)라고 물리치셨다.

그랬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절박한 욕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시험하여 자신을 증명하려 하기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태도를, 세상 권력을 통한 영광과 자기 숭배보다는 하나님만을 경배할 것을 천명하셨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됨됨이다. 지금 그대 곁에는 하나님께서 계신다. 그분은 그대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시 17:8) 시는 분이시다. 제발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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