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주의를 비판한 칼빈과 스콜라주의를 채용한 베자의 관계는??

1) 칼빈과 베자의 연속과 불연속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스콜라주의를 배격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중세 신학을 영광의 신학으로 규정하고 십자가 신학을 웅변했습니다.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에서 “스콜라주의”를 배격하는 내용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 다음의 개혁파를 개혁파 스콜라주의(Reformed Scholasticism, Post-Reformation Reformed Scholasticism, Lutheran scholasticism)라고 합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과 개혁파 스콜라주의의 연결성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김영규 박사는 17세기 개혁파 신학에 정통성(도르트 회의와 웨스트민스터 총회: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 strict reformed theology)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페리 밀러(Perry Gilbert Eddy Miller, 1905-1963)와 리차드 멀러(Richard A. Muller, 1948-)의 밀러 테제(Miller Thesis)와 멀러 테제(Muller Thesis)는 상반된 테제(Thesis)입니다.

로버트 켄달(R.T. Kendall)과 폴 헬름(Paul Helm)의 관계도 유사합니다. 켄달은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1979년)에서 칼빈과 잉글랜드 칼빈주의의 불연속성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헬름은 Calvin and the Calvinists (Edinburgh: Banner of Truth(1981년)에서 연속성을 주장했습니다.

켄달(R.T. Kendall)과 레인(Antony Lane) 등은 청교도들의 신앙과 확신의 구별이 칼빈의 입장으로부터 질적으로 이탈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헬름(Paul Helm)과 비키(Joel R. Beeke)는 켄달 그룹의 학자들의 견해를 비판하고 “확신을 믿음에 포함시키는 입장과 확신과 믿음을 구별하는 청교도의 입장”이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이은선, “칼빈의 성령론”).

대한민국의 신학계에서는 두 진영에 대한 확고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나타납니다. 멀러 테제를 지지하는 진영과 멀러 테제를 거부하는 진영입니다. 김영규 박사는 중간적 입장인데, 17세기 개혁파 사상에 대해서 긍정적인 강조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은 도르트 종교회의와 거기에 참석했던 신학자들의 사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멀러 테제를 지지하는 진영도 멀러 테제를 부정하는 진영에서 지지하는 사유 체계나 거부하는 사유 체계를 정확하게 분석하지는 않고, 단편적인 이해 수준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페리 밀러, 로버트 켄달의 사유 체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며, 리차드 멀러, 헬름에 대한 이해도 부족합니다. 헬름이 켄달의 견해를 비판하는 저술을 출간했는데(Calvin and the Calvinists, 92 페이지), 상당히 간략하게 내용을 진술했다고 생각합니다. 헬름은 켄달이 칼빈의 계승자를 잘못 이해했다는 주장입니다. 로이드 존즈 목사(Martyn Lloyd-Jones, 1899-1981)의 후임으로 존즈 목사와 다른 견해를 밝힌 켄달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대한민국 교회에서 로이드 존즈 목사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공정한 판단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로버트 켄달(Robert Tillman Kendall , 1935 - )은 로이드 존즈 목사의 후임으로 1977년부터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에서 25년 동안 목회했습니다. 그의 저서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는 후임으로 사역한 뒤에 나온 1979년 옥스퍼드 박사학위 논문입니다.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Oxford theological monographs), 238쪽입니다.

정이철 목사는 베자에게서 칼빈의 신학이 이미 왜곡되었고, 윌리엄 퍼킨스와 윌리엄 에임스로 부패가 증진되었다고 제시합니다. 정 목사는 많은 연구자가 칼빈과 베자의 불연속성을 주장했다고 밝혔습니다. 변화와 불연속성은 전혀 다릅니다. 정 목사가 인용한 연구자들이 정 목사의 주장처럼 칼빈과 베자의 불연속성을 주장했는지 의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들 대부분의 학자들은 17세기 돌트신경(1619)과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1647) 속에 요약된 후대의 개혁주의 신학은 칼빈 자신의 사상과는 다른 다양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해 왔는데, 그 변화는 이미 베자(Theodore Beza)의 사상 속에 뚜렷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상규, "칼빈은 칼빈주의자인가?"(교회와 신앙, 2003년 2월 12일)

“그의 논문은 약간의 첨삭과 수정을 거쳐 1981년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에서 <칼빈과 1649년까지 영국의 칼빈주의>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돌트신경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 표명된 관점들은 많은 점에서 칼빈의 사상과는 다른 다양성이 나타남으로 그것을 ‘칼빈적’(Calvinist)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같은 청교도운동의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신학을 칼빈이 아닌 베자에게서 전수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칼빈과 베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의 동일한 주장이 그의 논문 ‘칼빈신학의 청교도적 변형’ 속에 표명되었다. 그는 결국 ‘청교도신학은 칼빈주의적이라고 부를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앞의 글)

“최근 몇몇 현대 신학자들은 이 고백서(WCF, 1646)가 칼빈의 신학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은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당회장 목사인 R. T. Kendall과 미국의 Charles Bell 박사, 그리고 전 에버딘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J. B. Torrance 목사이다.

이들은 최근 발표한 그들의 논문에서 칼빈의 신학이 베자에 의해 잘못 가르쳐진 바, 이를 영국의 청교도들, 특히 윌리엄 퍼킨슨와 윌리엄 에임스가 영향을 받아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논쟁점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칼빈과의 상호연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칼빈과 베자, 영국의 청교도들의 신학 전통의 단절에 있다.” (서요한, <청교도유산>(그리심, 2006), 100)

서요한 교수가 켄달과 미국의 벨, 토렌스 등을 제시하며 칼빈과 불연속성을 제시했는데, 서요한이 그 사상에 동의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학술저서의 단순 제시가 있습니다. 서요한이 켄달이 제시한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긍정적 성향이 있다할지라도 정확한 자기 사상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서요한은 “칼빈과 베자를 하나로 묶고”, 잉글랜드 청교도와 단절을 제시하는 문장입니다.

“칼빈과 베자의 신학적 단절과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연구자”는 정이철뿐일 것입니다. 칼빈과 베자와 청교도주의와 단절, 불연속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상당합니다. 지금에는 연속성을 주장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멀러 테제). 그러한 경향이 대한민국의 지역적 특징인지, 세계적인 특징인지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멀러의 지도교수인 스타인메츠의 글은 로마 카톨릭과 베자의 연속성을 주장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과 루터의 사상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논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과 엄격한 단절, 기독교 회복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세르베투스처럼 기독교 재건이 아닌 기독교 회복입니다. 그러나 개혁파 진영에서 루터와 칼빈 그리고 후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1688년 명예혁명으로 유럽 사회는 전혀 다른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종교 시대가 종결되고 철학(계몽철학) 시대가 열렸고, 신학은 철학의 시녀가 되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주요 신학이 되었고, 루터파, 개혁파 진영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메인스트림이 되었습니다. 현대신학에서는 로마 카톨릭까지 합세하는 거대담론을 이루었습니다. 그 머리에는 철학이 있습니다. 개혁파후기신학의 머리에 스콜라주의가 있다는 것은 머리가 철학이라는 주장입니다. 결코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우리는 암흑 천년에도 참신앙, 참신학이 흐르고 있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 잉글랜드 장로파, 잉글랜드 독립파 기타 등등의 잉글랜드 청교도들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는 잉글랜드 장로파의 초기에 있습니다. 저는 잉글랜드 장로파(England Presbyterians)는 칼빈과 베자보다는 마틴 부써(Martin Bucer, 1491-1551)에 더 깊이 연관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틴 부써는 스탈스부르크에서 칼빈에게도 장로교회질서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했습니다. 1643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에 잉글랜드 장로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648년 12월, 크롬웰이 프라이드 대령으로 무력을 동원해서 3/4의 장로파 의원을 축출시키고(Pride's Purge), 1/4의 독립파 의원으로 잔부의회(Rump Parliament)를 구성하고 찰스 1세를 처형하고(1649년 1월) 공화제를 추진했습니다. 추방당했던 장로파는 1660년 2월에 찰스 2세로 복귀하여 새롭게 의회를 시작했는데, 그 의회에서도 채택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철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잉글랜드 장로파에 대해서 에라스투주의(Erastism)에 대한 우려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학식이 풍부한 존 셀던(John Selden, 1584-1654: 법학자)이 총회 석상에서 에라스투주의(Erastism)를 주장하다가 스코틀랜드 총대였던 조지 길레스피(Geroge Gillespie, 1613-1648)의 반론에 할 말을 잃어버린 사건은 웨스트민스터 총회 역사에 유명합니다.

잉글랜드 장로파, 잉글랜드 독립파 기타 등등의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왕당파를 몰아내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작성했고 국가법으로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종파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자기 집단의 표준문서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작성한 자기 고백을 자기가 채택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현상입니다. 반면 스코틀랜드 교회는 자기가 작성하지 않은 문서를 자기 문서로 채택하고 있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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