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읽기(2-3) 바울, 이방인의 사도

(갈 1:1-5)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교회에 거짓 형제의 가르침이 허용되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2:5). 어떤 사역자가 교회에 거짓 가르침을 허용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거짓 형제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거짓을 진리로 포장해서 전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고, 항상 “복음의 진리(the truth of the gospel)”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2:5).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의 진리는 자유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SC 1659, ἐλευθερώσει / ἐλευθερόω: free)케하라고 하셨습니다(요 8:32). 복음은 주의 자녀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진리 안에 강건하게 합니다. 거짓 형제는 주의 자녀를 죄에 얽매이게 하며, 교회 안에 있는 유기된 자들을 탈출시킵니다. 거짓 형제를 배격하고 추방해야 하지만, 교회는 거짓 가르침을 배격하며 그리스도인의 본래 소명인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은혜와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거짓이 파괴되는 것의 기쁨이 아니라 주 안에,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으로 말미암아 기뻐해야 합니다(눅 10:17-20).

둘째, 두 번째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함,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직분을 공적으로 획득했습니다(갈 2:7, 8). 처음 올라갔을 때에는 사울이 받은 계시가 부활하신 주께 받은 것임을 확증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넬료, 무할례자에게 세례를 준 첫 사역자입니다(행 10장; 사울의 회개 9장). 그런데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할 자로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인증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게바는 고넬료에게 세례를 줄 때 어쩔 수 없어서 세례를 주었습니다(행 10:44-48). 그리고 안디옥에서 외식을 함으로 안디옥 성도들을 실족하게 하는 실수까지 범했습니다(갈 2:11-14). 사울은 즉각 이방인, 열방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정당한 일임을 알고 수행한 사역자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이름없이 10여년을 이방인 지역에서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성령을 받았지만 옛습성이 있어서 예루살렘에 상당 기간 머물렀고 과감하게 이방 지역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몇 사도들은 예루살렘, 아라비아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에서 순교한 사역자는 베드로, 바울이고, 다른 사역자들은 아르메니아, 흑해, 에디오피아, 페르시아, 소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한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보다 더 과감하고 즉각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과감성은 바나바와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행 13장).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야고보, 게바, 요한이 확증하며, 바나바와 친교의 악수를 했습니다(2:9).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 가도록 했습니다(2:9). 참고로 규정은 절대적인 규정이 아니라 임시적인 결정입니다(벧전 1:1). 교회는 바울의 복음 사역의 정당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에 확장시키는데 바울의 역할은 놀라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음을 전도하기도 했습니다(행 21-26장).

셋째,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갈 2:10).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은 사도의 직무입니다(행 6장). 그런데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일이 소홀히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행 6장). 그래서 사도는 자기 직무를 이관시켰습니다. 집사는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역자인 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직분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

고대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와 교회 밖에 있는 가난한 자를 함께 돌보았습니다. 정상적인 교회는 가난한 자를 돌보는 교회입니다. 한국 교회는 선교에 열심했지만, 가난한 자를 돌보는대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기본인데,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도 기본입니다. 우선순위를 따지면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 더 우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가난한 자를 권면했는데, 바울은 이미 그것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부조하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은 모든 사도들에게 공통된 성격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가난한 자를 돌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보다는 약한 자, 소외된 이웃이라고 표현합니다. 약한 자를 지킬 수 있는 역량을 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도됨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짓 교사이며,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 바울의 진정성을 인정하며 동역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일치를 따라서 가난한 자를 돌보는 특징까지 공유하며 일치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일치되어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주의 자녀들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증진해야 합니다. 복음의 확장과 증진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협력해서 이루어야 할 가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주의 자녀들이 거짓을 분별하며 성령을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번 주도 주 예수 안에서 주의 십자가와 함께 거룩과 진리가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주님의교회)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주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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