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아가는 글] 이삭은 흉년의 시절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방 땅에서 세웠다.

하나님의 방법이란 이곳을 떠나지 말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다. 그 결과 그 해에 백배의 복을 받았다. 그리고 이삭은 이방 땅에서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다.


1.흉년에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


(1)성경은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서 흉년의 시절에 블레셋 사람들과 이삭을 비교하고 있다. 흉년의 시절에 자신들의 소득은 줄고, 이삭의 소득은 백배의 복을 받았다. 이삭이 복을 받은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12),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많았다.

(2)오늘 우리시대는 흉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저출산의 흉년의 장벽에 갇혔다. 10년 후를 예측하기가 무서울 정도이다. 교회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경건한 부모들이 경건한 자녀들을 출산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거룩하게 세워진다. 사명을 가지고 출산을 격려하고 축복해야할 시대적 상황에 놓여 있다. 저출산의 늪은 저주이다. 출산의 붐이 일어나는 것은 축복이다.

사회가 가지치기로 인해서 분열의 장벽에 갇혔다. 여야의 정치적 갈등 심화, 극좌우의 대립, 종교계도 비슷하다. 전문인 집단의 횡포와 국가 권력 간의 분열 양상은 보통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런 심성으로 미래를 열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국민성 개조가 필요한 시대이다. 분열의 장벽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분열의 장벽은 저주의 문화이다.

일터가 흉년의 장벽에 갇혔다. “일터는 곧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의 장이기 때문이다. 일터는 소중하다. 일터가 무너지면 삶이 무너진다. 우리의 일터는 52어의 작은 도시락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터를 주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간다면 직원들을 배불리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기는 축복의 일터가 될 것이다. 일터는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한다. 일터는 나의 선교지이고 목회지이고 교회이고 사명을 이루는 장소라는 사실이다.

(3)이삭이 흉년의 계절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백배의 복을 받았다. 하늘에서 주시는 기적 같은 복은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은혜이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세상방식으로 살 것인가? 항상 두 가지 선택사항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라. 그것이 옳다. 이삭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고난의 세월을 이겨냈다.


2.이방 땅에서 이삭이 세운 하나님의 나라


1)블레셋 사람들의 시기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이 잘되고 사업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시기했다(14). 그리고 이삭의 우물을 막아 버렸다. 또한 블레셋 왕이 떠나라고 강요하고 있다. 이것이 이삭이 처한 상황이다. 삶의 근거지를 빼앗긴 것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큰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성공하면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환경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인가? 이삭을 통해서 지혜를 배우면 좋겠다.

 

2)이삭의 행동

(1)이삭은 그곳을 떠났다(26:17).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이삭은 삶의 자리를 떠나서 이동했다. 때로는 말없이 피하는 것이 답일 수 있다.

(2)이삭은 다투지 않았다(26:18). 다시 우물을 팠지만 또 와서 우물을 막아버렸다.

이삭에게 배울 점이 참 많다. 우물을 파면 우물을 빼앗아 버렸다.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다른 곳에 가서 다시 우물을 팠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과 절대로 싸우지 않았다.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도 않고, 교만하지도 않았다. 이삭은 잘되고, 사업이 번성하고, 무엇인가 잘될 때, 더욱더 겸손한 모습으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본다. 이삭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데, 이방 땅에서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려고 끝까지 참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삭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3)이삭은 블레셋인들이 괴롭혔지만 다투지 않았다. 3번째 다른 우물을 팠다(22). 이삭의 온전함을 보고 더 이상 이삭을 괴롭히지 않았다. 이삭의 성품이 인정받은 것이다.

모든 것은 항상 결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치는 삶의 현장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폭풍우는 지나가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온다. 영원히 폭풍우가 몰아치는 경우는 없다. 다투지 않고 세 번째 옮겨서 우물을 다시 팠다.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 지었다. 르호봇이란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4)이삭은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운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일터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왕국을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지배받는 곳, 주님의 통치권이 지배 받는곳이 되어야 한다. 나의 일터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잠시 맡겨준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다. 주님의 것이다. 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청지기는 지혜로움과 성실함으로 주인이 맡겨주신 것을 잘 감당하는 것이 청지기의 사명이다.

(5)이삭처럼 다투지 않고, 내 것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이기는 방법이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다. 이런 성숙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이렇게 거꾸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많다는 것을 잊지 말라. 세상 원리를 거부하고 정반대로 거꾸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믿음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귀한 것이다. 자기 것은 조금도 손해 보기 싫어하고, 남의 것은 쉽게 생각하는 풍토에서 살고 있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사악한 지혜이다. 사악한 지혜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이기적인 풍토이다. 하나님 나라와는 걸맞지 않는 모습이다. 사악한 지혜가 판치는 이런 세상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갈 수 있을까? 이삭처럼 우직하게 바보스럽게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6)사악한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선한 지혜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하면 가능하다.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주인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 고백이 분명할 때 우리는 사악한 지혜에서 벗어나서 하늘이 가르쳐주신 지혜로 세상을 섬기면서 살 수 있다. 생애의 모든 영역을 그리스도의 지배아래 둘 때 가능하다. 나의 삶의 모든 목표를 주님께 초점을 맞추면 사악한 지혜를 버리고 거꾸로 살아가는 우직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가 있다. 내 삶의 모든 통치권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


3.이삭이 준 영적 유산은 평화이다.


(1)이삭의 인내의 결과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의 메세지를 보라.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게 복을 줄 것이다. 네 자손을 번성"(24절)하게 할 것이다.

(2)블레셋의 아비멜렉 왕과 친구 아비훗과 군대장관 비골이 이삭을 찾아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서로 해하지 말라(26:28-29). 라고 요청했다.

(3)하나님의 나라는 지고 이기는 나라이다. 믿음의 길은 항상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이삭은 이방 땅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만들어가야 할 나라이다.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세상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세우는 것이다. 세상왕국은 바벨탑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진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4)여러분과 함께 삶을 나누고 살아가는 분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함을 분명히 보았다는 간증을 듣기를 원한다. 이렇게 인정받았다고 한다면 당신은 잘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4.우리는 왜 평화를 주장하고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내야 하는가?


(1)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2)예수님은 영원한 평화를 주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2:13-17).

(3)예수님은 우리가 평화의 사도로 세상을 바꾸기를 원하신다.

화목하라. 손해를 보아도 믿음으로 이기고 원수를 맺지 말라. 손해 보는 자가 이긴다. 세상의 이익을 버리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얻는다. 사람 관계에서 이기려고만 하는 사람은 결국은 패자가 된다. 신앙은 양보이다. 믿음의 길은 내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믿음의 길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화목케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4)화목과 관계된 성경구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2:18).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3:14)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3:17)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12:19,20).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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