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고난 주간

1.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 25-39 찬송가 146장 저멀리 푸른 언덕에)
로마정부와 유대 종교당국의 정치적 이유로 아무 죄도 없는 예수께서 변호인도 없이 즉결 재판에서 십자가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렸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던 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주변에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들만 남았습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제자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온 세상은 어둠에 휩싸여 깜깜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외쳐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왜 예수님이 최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인가요?“ 예수님이 마음을 터놓고 인격적으로 불러볼 수 있는 이름을 자진 자가 근처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최후까지 예수님 곁에서 남아서 그에게 인격적으로 불러 볼 수 있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영혼과 몸을 맡기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즉각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는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고 하면서 갈대에 단 해면으로 포도주를 적시어 예수님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나 보자 하였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침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그 응답의 신호는 예수님 운명하신 후에야 찾아왔습니다.
그 응답이 무엇인가요?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38절)“. 그동안 유대전통에서 성소휘장은 왜 필요했는가? 출애굽기 26:31-37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휘장을 만들어 성소와 지성소의 구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휘장 안에 증거궤를 두게 했습니다. 증거궤위에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속죄소를 두게 했습니다. 이 휘장 안을 지성소라고 하고 어떤 자도 함부로 하나님이 계신 보좌 앞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휘장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휘장 바깥은 성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지게 하시므로 십자가에서 부르짖은 예수님에게 응답의 신호를 하신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지성소와 성소의 경계가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담이 허물어지고 서로 왕래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개입을 시작한다는 신호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개입하게 된 첫 번째 증거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한 백부장의 고백입니다. 백부장인 누구인가? 황제의 명을 받아 로마 군병들을 지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십자가 현장 지휘관 로마 장교였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한 자에 일어나는 현상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에 최고 지휘관이 예수님의 운명하시는 과정을 지켜본 후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복음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37-39절)”

 

2. 고난속에서 시인의 우선순위(시 31:9-16 찬송가 150장 갈보리산 위에)
시인은 하나님을 평생 섬겨온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그에게 항상 세상에서 복되고 잘되는 일만 같이 보여집니다. 도리어 시인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피하오니 영원히 나를 부끄럽게 하시 마시고 ....나를 건지소서(1절)”.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9절)”.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10절)”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11절)”. 시인처럼 신실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서 이같은 고난을 받게 되는가? 그가 시련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시인은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기를 “나의 죄악으로 인하여 기력이 약하여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세상에 법을 어긴 범법자란 말인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가 스스로 자신의 죄악 때문에 기력이 약하여졌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인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영적으로 불충했던 부분을 성찰하는 중에 하는 고백입니다. 이 죄악은 세상의 법을 어긴 범죄가 아닙니다. 이 죄악은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무례를 범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사람과 관계에서 그가 바르지 못했던 것을 반성적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그의 심층부에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가 회개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에워싸였다(13절)”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양심에 꺼리는 것이나 두려움의 요소를 조금도 마음에 남겨두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런 두려움의 요소들이 깨끗이 씻겨져 나가기까지 한시도 편안하게 지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죄악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용서만이 그의 마음 가를 떠나지 않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시인은 우선순위의 첫째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고난을 겪을수록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우선순위의 첫 번째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시인은 하나님을 전적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15절)”.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16절)” 시인은 살고 죽는 일 곧 자신의 앞날이 자신의 힘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죄악에 빠진 자신을 구원해 주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살길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기도한 결과 시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22절)”. 그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헷세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자신을 의지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그는 체험한 것입니다.

 

3. 고난의 종(사 50:4-9 찬송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
예언자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시작한 지 40년 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고난의 종으료 묘사되고 있다. 이 고난의 종이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왜 고난을 받는가?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거절하고 배척을 하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전하는 것은 자신의 메시지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이 종에게 고통과 치욕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에언자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거절이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그들 간에 신뢰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어떤 고통과 수모를 당하고 있는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6절)”. 폭행과 수염을 뽑힘과 뺨맞음과 침뱉음 당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예언자가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 떨지 않았다고 한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7절)”.
그런데, 예언자가 엄청난 치욕과 고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자 앞에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없이 담대하고 평정한 마음가짐을 유지 하면서 그들과 맞대면 할 수 있었는가?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예언자는 의로운 자 곧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최종적으로 재판을 내릴 의로우신 재판장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언자는 반드시 공의로운 판결로써 승리를 주실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초대기독교인들은 이 고난의 종이 당하는 수모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고난의 종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치욕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가 백성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를 사랑의 말씀을 전하였다.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4. 자신을 비운 그리스도 (빌 2:5-11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빌립보교회는 경제적으로 마음으로나 바울에게 기쁨이 되는 교회입니다. 따뜻한 후원은 바울의 복음 선교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아담과 다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다른 점은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한번 먹어 보았으나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운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인 사람들과 같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처럼 되신 이유는 자기를 비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기를 비운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그가 비록 부요하였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졌다고 하는 고후 8:9에서처럼 비운다는 의미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순종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자기 홍보 지향적인 옵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간과 연대하는 쪽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서신의 맥락에서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 죽음의 선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발명품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예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신 이름을 수용한 것입니다. 그 이름은 무엇인가? “주님(the Lord)"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항복하고 높이 경배하고 영광을 돌려야 마땅한 ”만유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5. 예수님의 곁을 지킨 자는 누구인가?(막 15: 11-15, 39-41 찬송 146장 저멀리 푸른 언덕에)
 유대 대제사장들은 새벽에 약식재판을 거쳐서 예수님을 결박하여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그들로부터 넘겨받은 고발내용에 따라 심문하던 중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고발의 핵심은 예수가 왕이라는 것이다. 유대의 치안질서의 최고 책임자로서 그는 할 수 있는 한 그가 입수한 정보를 최대한 동원하여 로마제국에 도전이 될만한 근거를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마정권에 위협이 될만한 어떠한 요소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가 로마에 위협이 될만한 최소한의 군대에 버금가는 어떤 조직도 예수님에게는 없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면서 타고 온 것도 말이 아니라 나귀새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국인 유대의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를 극형에 처해달라고 고발했다. 
   로마의 당국의 법만으로는 최고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한 빌라도는 유대 대중들인 무리들에게로 그 안을 가지고 온다. 그는 무리들에게 물었다. “유대인의 왕 예수를 너희가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당시 로마의 정부에 있었던 사면제도를 통해서 빌라도는 유대인의 해방절인 유월절에 한명을 특사로 풀어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왜 빌라도는 특별사면을 위해 무리들의 여론을 중시하였는가? 그 무리들의 여론이 유대지역의 총독직의 수명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에서 빌라도는 예수의 재판의 최종 판결을 무리들의 여론에 의존하였다. 빌라도는 세 번이나 무리들에게 유대인의 왕 예수를 어찌하랴? 질문하였고 무리들은 세 번이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대제사자들의 고발로 로마의 재판장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님은 고발한 죄목에 대한 검증과 변호의 절차가 생략된 채 무리들의 외침에 의한 인민재판으로 최고 극형인 십자가형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한 대제사장들과 로마의 평화를 위해 법을 최고의 가치로 자랑하던 유대의 총독이자 재판장인 빌라도가 죄없는 자를 어떻게 이같은 방식으로 극형으로 몰아갈 수 있었는가? 여기에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유대당국자들인 대제사장들의 정치적 이익과 로마당국의 유대지역 대표인 빌라도의 정치적 이익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 양심과 법의 양심에 의한 사람을 구제하려는 재판이 아니라 죄없는 자를 희생양으로 몰아서라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있는 재판이 예수의 재판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면서 예수님을 마치 다윗왕이 나타난 것처럼 환호하던 무리들은 왜 갑자기 그들이 메시야라고 환호하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는가? 그들 또한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로부터 충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그 많은 무리 속에서 “아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 역시 장차 자신들에게 다가올 위험들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의한 재판에 의해 극형의 장소로 가는 예수님 곁을 지켰는 자는 누구인가?
아무도 없었다. 가까이 있었던 자는 오직 그의 오른 편과 왼편에 매달렸던 강도들이다.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운명까지 최후 지휘한 백부장이다. 그리고 멀찌감치서 바라보던 여인들이다.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하던 제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지켰던 자는 하나님이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호소를 직접 듣고 있었던 하나님만이 예수의 운명까지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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