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2:15-16)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Ἡμεῖς φύσει Ἰουδαῖοι καὶ οὐκ ἐξ ἐθνῶν ἁμαρτωλοί, εἰδότες δὲ ὅτι οὐ δικαιοῦται ἄνθρωπος ἐξ ἔργων νόμου ἐὰν μὴ διὰ πίστεω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καὶ ἡμεῖς εἰς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 ἐπιστεύσαμεν, ἵνα δικαιωθῶμεν ἐκ πίστεως Χριστοῦ καὶ οὐκ ἐξ ἔργων νόμου, ὅτι ἐξ ἔργων νόμου οὐ δικαιωθήσεται πᾶσα σάρξ.


사람이 의(義)롭게 되는 것(justified)이란?

δικαιόω(1344)는 신약에서 39회 등장합니다. 6절에서는 δικαιοῦται(not justified, 현재 중간태/수동태), δικαιωθῶμεν(to be justified), δικαιωθήσεται(no one will be justified) 단어가 사용됩니다. δικαιοῦται(행 13:39, 갈 2:16, 갈 3:11, 약 2:24)은 신약에서 4회 등장하는데, 율법(the law)나 행위(the work)와 연결되어 부정 표현으로 제시되었습니다. δικαιωθῶμεν(갈 2:16, 갈 3:24)은 신약에서 2회 등장합니다. δικαιωθήσεται(롬 3:20, 갈 2:16)은 신약에서 2회 등장합니다.

”의롭게 됨”에 대해서는 동양 철학에도 꾸준하게 탐구되는 부분입니다. 1341에서 δίκη(1349: properly, right, especially a judicial verdict)까지 연관어입니다. 헬라어의 다양한 어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와 체다카의 어휘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이해에서 쉽지 않습니다. 미쉬파트(mishpat)는 헬라어 크리마(κρίμα)로 번역되는데, 체다카(tzedakah)는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 dikaiosyne, 1343)를 기본으로 다양한 어휘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맹자는 4단설(四端說), 사단지심(四端之心)을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주장했습니다. 인(仁)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의(義)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예(禮)에서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히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 지(知)에서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으로 구성했습니다. 의(義)는 선악(善惡)에 대한 문제로 보았습니다.

갈 2:16에서 의롭게 됨은 칭의(justification)으로 보입니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선악의 문제를 하나님의 법에서 판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의로운 것은 선을 선이라고 하고, 악을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 뱀의 말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악이라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집중했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뒤에 스스로 생명나무를 먹으려고 생각할 것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그 길을 차단하셨습니다(창 3:2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쉬운 단계가 아니라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선언한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사람이 없습니다(갈 2:16).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διὰ πίστεω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16절). “율법의 행위(works of the law)”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faith in Jesus Christ)”을 의로움에서 대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faith)”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faithfulness)”이라고 바꾸어 전환시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목적격 속격(objective genitive)과 주격 속격(subjective genitive)으로 분류합니다. 주격적 속격이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분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격적 속격,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분류하는데, 그것은 율법의 행위와 대조시키기 때문입니다. 율법 자체에 의(義)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에서 의를 얻을 수 없다는 앞 문맥과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과 대조시키는 것입니다.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갈라디아서가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명령 앞에서 행위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할까요?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8:5)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잠 4:4)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지키라’ 외에 다른 용례들이 있습니다.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창 21:33),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슥 13:9),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습 3:9) 등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6).

율법은 지켜야 합니다. 율례와 규례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지킴은 표현되는 것입니다. 행동하기 전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복음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살인, 도둑 등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마 5-7장). 행위는 표현으로 무시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데, 형식이 내면을 지배할 때도 있습니다. 은혜의 종교에서 가장 큰 난점 중에 하나는 교육입니다. 그럼에도 교육과 훈련에 힘을 다하는 것은 형식이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행동에 의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마음에 의로움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주신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켰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것입니다(요 5:46). 그런데 모든 유대인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여선지자 안나와 시므온 제사장(눅 2장)이 어린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그들은 십자가 시간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장 큰 자이지만 가장 작은 자로 표현하셨습니다(눅 7장). 이런 분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 먼저 십자가에 달리셨을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의 사람이기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이나 갈릴리 사람들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고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 모두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하거나 묵인했습니다. 진리를 묵인하는 것은 결코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음의 마음으로 율법을 행할 것입니다. 믿음이 표출되는 형식은 율법을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시대의 두려움은 법률을 지키는 것이 믿음이 표출되는 형식과 차이가 너무나 많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양심을 지키지 못할 법률도 제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양심을 지키며 법률을 체계화할 수 있는 역량을 구비해야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죄를 구속하시고 택하신 백성을 부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인 것은 부르심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3년을 거주하셨고, 믿음을 고백하셨고, 부활의 목격자이기도 하며,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이방인에게 사도 바울이 사도인 것은 부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심의 소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영향력에 의해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효력에 들어가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천상의 구주 예수께서 부르심으로 믿음을 가졌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의롭게 되면 영향력이나 가치에 의해서 의롭게되는 것입니다. 즉 천상의 주께서 부르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여러분의 이름을 지명하여 부르신 주님의 음성이 심장에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에 이른다고 믿고 고백하며 전파합니다. 이것은 성경해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렇게 전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었느냐?에 대한 의견은 새관점학파가 등장하면서 나뉘었습니다. 그전에는 예수를 믿은 것이 부당하다는 내용이 많았는데, 새관점학파에서는 예수를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는 주장이 출범했습니다. 지금도 2-3세기에 교회에서는 “예수를 종교적으로 믿었다”는 주장이 상당히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도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는 사도들이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자들이 예수를 믿도록 훈련시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