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2040년이면, 에어택시는 현실화 되어 약 730조원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보이며, 이에 이미 발빠른 기업들은 구체적으로 이 시장에 모여들고 있다.

'K-UAM'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의 Y 방송사에서도 이미 보도한 바 있는 이 시장은, 그러나 그 기본적인 시스템 구축상 향후 2-10년 사이에 현실화 될 것인지도우리 하기 나름이라며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인물이 있다.

지난 318, 그는 지방의 한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지역으로 발길을 움직였다. 그가 이번 걸음에서 행한 작업은, “지극히 간단한 작업이면서도 지자체가 원하고 국가가 원한다면 우리의 유산을 보다 더 안전하고도 오랜 시간 잘 유지보존 할 수 있는 보다 과학적인 시스템 구축을 위해 앞서서 자료를 보관한다는 취지도 있다.

이번에 그가 인터뷰에 응하면서 보너스 삼아 행한 작업은, ‘디지털트윈 작업을 통해 특정 유산물을 심층 촬영한 것이다. “이 유산물의 경우 어디가 얼마나 깨졌고 앞으로 더 파괴될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 어디이며 보수를 우선해야 하는 곳은 어디며 얼마나 보수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의 상태를 기록해 놓음으로써, 나중에 복원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도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사진 몇 장만 있어도 복원이 되는데, 디지털트윈 자료가 있으면 너무도 정확하게 복원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현장에 가지 않고도 실물처럼 볼 수 있어요하고 설명하였다.

2018년 11월 22일, 건국대에서의 드론 3D 모델링 신설 과정 설명회 모습. 우측 등진 인물이 스마트운행체공학과 김상호 교수다.
2018년 11월 22일, 건국대에서의 드론 3D 모델링 신설 과정 설명회 모습. 우측 등진 인물이 스마트운행체공학과 김상호 교수다.

아직은 공개적으로 자료를 공개하기가 조심스럽다는 그는, 공간정보처리기술사로서, 3Dmap 기술 특허도 보유하고 있다. 드론 매핑과 드론 원격탐사 활동도 겸하고 있는 그는, 항공 사진측량용 무인항공기(Digital Photogrammetry UAV)를 통해 다양한 연구 활동 중이며, 이에 건국대학교에서는 초빙교수로서 스마트운행체공학과에서 연구 중이다. 특별한 경우, 강의도 겸하고 있다.

현재 플라잉카는 국내 식자들 사이에서는 ‘flying car’를 국내식으로 발음하여 불리우고 있거니와, 이는 현재 공용어는 아니고 ‘Aeromobil’ 이라는 말로 표기되어 표현되고 있다. 영어에서도 아직은 공용어가 아니다. 독일어에서는 항공기 정도로 간략히 검색되는 정도의 단어다, ‘아직 비상용화 된 용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플라잉카의 현재 수준과, 해당 비행체가 운항 가능한 단계 혹은 그 현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반 고객의 안락한 비행은 아직 멀었고, 당분간 조종사가 탑승할 계획이므로 자율비행은 아직 미성숙 상태입니다. 정부도 2030년 정도로 길게 보고 있습니다하였다. 하지만 사실상 플라잉카의 개발과 생산은 다양한 디자인으로 완성된 모습도 식자들 가운데는 이미 알고 있는 상태.

이러한 플라잉카는 관제시스템 구축이 불가피한데, 현재는 수도권으로 제한되어 있고 항로가 그어진 상태이나 비행 데이터 축적이 안된 관계로, 상업적 분석은 전무한 상태라 한다. 그러한 가운데 앞서 언급된 730조 규모의 섣부른 언급은, 전문 엔지니어링의 분석으로는 참 심란한 것도 사실이다.

금번 인터뷰 중,유적지 촬영에 임한 서정헌 교수
금번 인터뷰 중,유적지 촬영에 임한 서정헌 교수

관제시스템은 플랫폼을 만들어야 합니다. 관제시스템 플랫폼의 설계는 현재 하고 있지 않습니다. 관재시스템의 공간정보가 매우 정확해야 한다는 사실들에는 동의 하지만 내가 알바는 아니다의 상태죠라는 그는, 충현교회(담임 한규삼 목사)에 출석중이다. 그의 직분을 묻자 제 직분은 단지 성도라고만 말하기 원하며, 그 이상은 언급 삼가하기 원합니다한 그는 서정헌 교수이다.

드론 촬영으로 담은 충현교회 전경
드론 촬영으로 담은 충현교회 전경

서정헌 교수는, “퇴계로에 충현교회(당시에도 상당히 큰 규모였음)를 지었을 때도, 중부시장에서 장사 하시는 어머니들이 전 재산을 드려서 지었고, 역삼동 충현교회를 지었을 때도 많은 홀어머니들이 전 재산을 드려서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들의 이름은 없습니다.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10억원을 내어놓았건 100원을 내어놓았건, 헌금봉투에는 이름을 적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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