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직전에 놓인 영은 아주 선명한 의식으로 주위를 살핀다. 머리맡과 침대 끝 모서리에 검은 물체 셋이 있고 좀 떨어진 곳에 하얀 모습의 네 형상이 보인다. 순간 세 악령과 네 천사의 존재가 인식된다. 영체는 바뀌지 않을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체념 상태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천사들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보여도 도와달라는 손짓도, 눈짓도 전혀 할 수 없다. 악령들이 천사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게 자리 잡고 악에 익숙했던 영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한다. 임종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영을 감시하는 지옥의 사자들에게 항거 한번 제대로 못 한다. 전도 받던 장면이 어슴푸레 기억난다.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답니다.” 무식하고 유치한 짓거리라 비웃으며 무안을 주어도 끈질기게 자신을 설득했던 것이 사실은 생명으로의 초대장이었음을 깨닫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상황에서 영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도 서지 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천사 넷 중의 하나가 영 곁에 선다. 천사 셋이 악령 셋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나머지 한 천사가 영에게 접근한 것이다. 육체는 모든 기능이 중단된 상태지만 의식은 남아 있다. 천사는 그의 모든 옛 기억을 더듬어 구원받을 믿음에 연결시킬 뭔가 있을까 살피지만 그럴 만한 것이 없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누군가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주면 좋으련만 방문객들 중에는 신자가 없어 보인다. 영이 빛의 천사를 보자 본능적으로 천사에게로 기울여지려 애를 써보지만, 평생 다져온 악의 기운에 눌린 영이 꿈쩍도 하지 않고 세 악령이 세 천사와 힘을 겨루면서 매서운 눈길을 쏘아 보낸다. 천국이나 지옥의 존재를 아예 믿지 않던 영임에도 악령들과 천사들을 번갈아 보면서 갑자기 영적 현실에 눈을 뜬 영은 천국이 좋고 지옥이 나쁜 곳임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어떡하든 천사 쪽으로 향하려 기를 쓰는데 죄와 악으로 굳어버린 영이 요지부동이다. 의식은 천사 쪽을 지향하고 있는데 이미 사탄의 통제 하에 들어간 영은 악령들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죽은 영은 측은하기 짝이 없다. 이미 주님의 긍휼 권역을 벗어나 사탄의 영향력 아래 놓인 영은 백보좌 심판을 받기 전에 이미 악령들의 탈취 대상이다. 그가 갈 곳은 영원히 마귀를 위해 예비 된 곳뿐이다. 절망과 고통과 사망의 기운으로 가득 찬 곳인데 악령들의 낯짝만 보아도 까무러칠 지경이다. 낯선 전도자들을 멸시하며 신자라는 이유로 사람을 깔보고 신성모독적인 발언에 늘 앞장섰던 영에게 있던 당당함은 모두 사라졌다. 체념한다 해서 영영한 고통이 감해지지 않으니 지난 시간이 원통하고 후회스럽다. 지옥의 불길이 스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화기로 인해 의식은 혼미하다. 아물거리는 잔상들이 옛 기억을 들추며 지나가는데 아무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영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괴로워할 뿐이다. 멸시 당했던 글자 얼마라도 돌아와 주었으면 구원의 말씀을 보기라도 할 텐데. 창검에 찔려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악령들에게 봉인당한 영은 침묵이다. 영의 처참함을 바라보는 네 천사의 안타까움만 짙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