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은 부활신앙의 열매들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고난과 죽음만 있다면 절망의 종교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이천년 전 부활 당시에서부터 초대교회 시기에 세상이 감당치 못할 만큼 허다한 증인들을 만들었다. 기독교인 들은 바울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사도들의 부활증언을 믿는다. 그들이 부활의 첫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은 바로 그 부활신앙의 열매들인 것이다.

회당장의 딸을 고치러 가다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을 고쳐주는데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예수가 망설이는 도중에 회당장의 딸이 죽어 버렸다. 그런데 예수가 그 죽은 딸을 살려주었다. 왜 한 본문에서 두 개의 사건을 함께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는가?

예수께서 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을 고쳐주고 대화하는 사이에 회당장의 집에서 하인 하나가 와서 회당장에게 딸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한다. 그 때 예수께서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다. 그 후 회당장의 집에 갔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방금 죽은 회당장의 딸을 보고 통곡을 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너희들이 어찌하여 시끄럽게 우느냐!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다. 아이의 부모를 데리고 들어가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즉 소녀야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놀라운 것은 그 아이가 일어나 걸어 버리는 것이다.

성경본문은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 여인 두 사람의 믿음을 보면서 무엇이 참 믿음인지 밝혀주고 있다. 막5:23절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주님 앞에 나아와 자기 딸이 병든 것을 고쳐 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의 능력을 믿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엎드려 절하면서 당장 죽게된 내 딸을 살려달라고 하면서 “오셔서 내 딸 몸에 손을 얹으시면 딸이 낫겠습니다.” 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혈루증 여인과 그러는 사이에 야이로의 딸이 이미 죽어버렸다. 혈루증 여인과 말씀하실 때 회당장 집에서 하인 하나가 뛰어와 딸이 죽었다고 알린다.(막5:35) 그리고 하인이 왜 지체해서 우리 주인을 괴롭게 하느냐고 예수께 항변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다.

요11장에서도 예수는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가신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의 의도는 분명히 의도적인 지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예수의 그 다음 행동과 말씀들이 증거 한다. 예수는 여유 있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회당장의 집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이미 죽은 딸을 두고 울며 통곡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어찌하여 우느냐!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나사로 죽었을 때도 똑같이 하셨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전부 비웃어 버리는데, 예수는 죽은 아이의 부모와 함께 들어가 달리다굼 하면서 죽은 아이를 살려 버리신다.

여기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 앞에 와서 절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예수를 보고 자기 집에 와서 예수가 자기 아픈 딸에 손을 대어 낫게 해 달라고 믿음과 혈루증 여인이 예수가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옷자락에라도 손을 잡으면 자기 병이 낫겠다는 믿음의 차이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백부장의 믿음인 “말씀만 하옵소서”의 믿음을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여자가 가지고 있고, 꼭 예수가 자기 집에 와서 아픈 사람 위에 손을 얹어야 낫겠다는 믿음은 왕하 5장에 보면 말씀을 불신하는 나아만 장군의 태도와 같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걸려서 엘리사에게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엘리사가 하는 말이 요단강 물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했더니 나아만 장군이 분노하여 하는 말이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와서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했는데 건방지게 안에서 콧베기도 안보이고 더러운 요단강 물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다.

이러한 나아만 장군의 생각과 회당장 야이로의 생각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나아만 장군도 엘리사가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알고 엘리사를 찾아갔다. 야이로도 예수께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찾아갔다.

그런데 문제는 내 생각이다. 내 생각은 주님이 주신 믿음에 지극히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릎 꿇고 주님의 방식에 순종하는 자세이다. 예수님 앞에 가서 이렇게 저렇게 해서 고쳐달라는 사고방식은 말씀 한마디의 권세를 믿기보다는 자신의 자존심도 살려주는 예수를 믿겠다는 것이다. 내 위치가 있고 사회적 신분도 있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나도 체면상 몇 마디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쓸데없는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 주님은 가던 도중에 지체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에게 간접적으로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 내가 보여 주겠다”는 차원에서 도중에 혈루증 여인을 붙들고 병도 고쳐주고 죄 사함도 선포하신 것이다.

회당장 야이로 앞에 혈루증 여인은 참으로 황당하고 짜증나고 하찮은 여인이었고 귀찮은 여인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시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죽은 자를 잔다고 하는 예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교만하게 예수를 비웃는 야이로와 그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죽은 딸을 살리시면서, 비웃는 거짓 믿음의 소유자들을 고발하고, 진짜 말씀의 능력이 무엇인지 그들이 보는데서 확증시켜 버린다.

죽은 자도 말씀으로 살리시는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 요11장에서 예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했다. 인간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말씀으로 죽은 자도 살리신다. 죽어도 살려준다는 말씀을 믿는다면 더 이상 예수에 대해서 말할 이유는 없다. 오직 말씀에 순종뿐이다. 불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고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이 순교가 아니라, 오늘 이 말씀 즉 ‘죽어도 다시 살려 준다’는 예수의 말씀 한마디 믿는 것이 순교이다. 죽어도 살려 준다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믿으면 살고 못 믿으면 죽는다.    

고전15:12-19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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