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유태화 교수의 영화평론

지난 5월 25일 한국개혁신학회 창립20주년 기념 학술대회 참석중인 유태화 교수

"절대 현혹되지 마라",,,    

영화 <곡성> 포스터 한 가운데서 읽게 되는 문장이다. 아마도 감독 나홍준이 이 영화를 통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키는 문장이다. 나홍준은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된 것이 자신의 경험 때문이라고 밝혔다. 추격자인지 황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신의 영화 한 작품을 끝내자마자 가까운 친척의 예상 밖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왜 그토록 착한 사람이 이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신정론적인 질문을 던진 셈인데, 감독의 고민의 핵심에 “왜 무고한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과연 우주와 인간의 삶을 이끄신다는 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하는 범주의 질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심사로부터 영화는 기획되었고, 그 이름이 곡성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곡성(哭聲)은 전라남도 북동부의 한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면서 동시에 감독이 끌어안은 고민의 현실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곡성(哭聲)은 죽음과 같은 사건 이후에 드러내는 인간의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지역성을 벗어나는 어떤 차원, 곧 감독의 실존적인 고민이라는 차원을 포괄한다고 여겨진다. 흥미로운 것은 나홍진 자신이 품은 신정론적인 질문을 풀어나가는데, 자신의 경험에서 취한 가능한 범주에서의 상당한 종교적 지식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얼른 보아 어떤 종교적인 영화인 듯 오해를 살 정도이다.

그의 종교학의 구조가 무엇인지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영화상에서나 혹은 감독 자신의 인터뷰에서나 곡성이라는 마을은 애초부터 어떤 신적인 존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 무명으로 등장하는 천우희다. 영화 전체의 줄거리로 보자면, 천우희는 일본에서 온 무당 쿠니무라 준이나 내국인인 무당 황정민보다는 훨씬 더 능력이 크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황정민이 분한 일광으로 하여금 피를 토하게 만들고, 쿠니무라 준이 종구 일행을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서 어떤(?) 작용을 함으로써 죽음에 내몰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우월한 존재인 무명은 곡성에 본래부터 연관을 맺고 존재해왔으나 그곳 사람들의 삶 그 자체에는 그렇게 깊은 연관을 맺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어떤 위기에 빠질지는 알지만 그들의 삶에 주도적으로 혹은 결정적으로 개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잡신의 범주에 속하는 쿠니무라 준이라든가 일광과 같은 세속적인 무당들이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이다. 영화상에서 이들은 적극적으로 악한 존재들이다. 무명이 선악 간에 자신의 선택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존재라면, 외부인이나 일광은 적극적으로 악을 꾀하며 마을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간다. 영화를 얼른 보면, 마치 굿을 하는 일광과 산속 자신의 집 은밀한 곳에서 주문을 거는 외지인이 영적인 대결을 벌이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일광의 굿판은 영화상에서 이전에 있었던 굿판과 많이 닮았고, 종구의 딸을 살리려는 듯 몸부림을 하지만 사실은 굿을 통해서 불러오는 살은 정확히 종구의 딸을 겨냥한다고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외부인으로 분한 쿠니무라 준도 일광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지 않고서 박춘배에게 주문을 걸고 있다고 봐야 한다.

외부인은 마을 주민들에게 주문을 걸어 두려움에 떨게 하거나 생명을 앗아가고, 일광은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로 자처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접근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을 털어먹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지점에서 나홍진의 귀신들에 관한 이해는 어느 정도 정도를 걷고 있다고 판단되는데, 본래 잡신들은 두 방면에서 일한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악을 구축하고 선을 불러들일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외부인 주술사는 잡신을 불러들여서 인간을 점유하고, 파괴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일광은 그런 위급한 일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수 있는 것처럼 접근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허물기 때문이다. “겁박”하고 “위무”하는 방식으로 구별되게 일하는데, 공통적인 것은 서로 사람들을 털어먹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 내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이유로 해서 주문에 걸리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화 공식 포스터 한가운데 기록된 문장에서 이 질문에 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 “현혹”되기 때문이다. 현혹(眩惑)은 무엇엔가 정신을 빼앗기기 시작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낚이는 것이다. 영화가 외부인 쿠니무라 준이 낚시하는 모습과 함께 열린다는 사실은 영화상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을 이룬다. 미끼를 무는 것,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첫 살인을 부르는 한 여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낚시질을 하는 쿠니무라 준에게 어떤 성적인 매력을 느낀 것처럼 보인다. 현혹되는 것이다. 넋이 나가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삶이 파괴된다. 종구의 동료경찰도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서 산속 집 사건을 가진이후로 그 관심사를 딛고 서질 못한다. 영화 마지막 지점에서도 무명과 일광 사이에서 종구는 돌아가야 할지 머물러야 할지 방황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가 직면하게 되는 한계상황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누군가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누군가는 신적인 힘에 압도되는 어떤 계기를 경험함으로써 주문에 걸린다. 종구의 딸도 어떤 일인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쿠니무라 준과의 어떤 만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암시이긴 하지만 종구부부의 성관계와 그것을 지켜본 딸, 그리고 딸과의 대화에서 정상성을 넘어서는 어떤 암시 같은 것을 영화의 전개과정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보게 만들지 않나 싶기도 하다. 어쩌면 이러한 읽기는 지나친 것일 수 있다. 어쨌거나 중요한 일은, 외부인 쿠니무라 준이든 일광이든 간에 곡성에 거주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욱 문제를 심화시켜서 그 구렁텅이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현명한 것은 이런 흐름의 주문에 걸리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는 과정에, 죽은 것 같았던 종구가 깨어나면서 내뱉는 장면이 감독이 가진 삶에 관한 이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결국 미혹 혹은 현혹이라는 덫에 걸리지 않는 길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서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정론적인 이슈를 제기했지만 나홍만은 실제로 모든 문제를 신에게로 귀속시켜서 인간을 미혹하거나 파괴하는 존재로, 혹은 인간을 향한 어떤 동정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존재로 만듦으로써 사실상 신을 무력화시켜버린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문제 상황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일구어내는 존재는 인간밖에 달리 없다는 자기 신념을 중요한 메시지로 삽입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비신화화과정을 통해서, 현존재인 인간의 자기 실존의 결정권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싶은 것이다.

신정론적인 질문은 곧 인간론적인 답변으로 끝나는 셈이다. 현혹이 가능한 한에서 쿠니무라 준의 주문은 계속될 것이고, 낚이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미혹을 통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훔쳐가는 일을 그 힘에 의지하여 계속할 것이다. (사진을 촬영하는 것을 아프리카인들은 영혼을 빼앗는 일로 간주한다.) 이렇게 귀신의 세력 하에 들어간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일광은 계속하여 돈을 요구하며 개입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무명은 무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바는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일밖에 달리 없는 것이다. 꿋꿋이 일어설 수밖에 달리 선택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추슬러 세우는 일 외에 달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의 가치를 보아야 한다는 한 중요한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나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소속의 젊은 부제의 모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홍진이 어떤 류의 종교적 지향을 가진 인물인지 잘 모른다. 다만 그의 눈에 비친 교회는 이런 인간의 곡소리 나는 삶의 현실에 대하여 너무 냉담하거나 혹은 무지하지 않은가 싶다. 인간의 삶에 파괴적인 주문을 거는 쿠니무라 준과의 대면에서조차 눈물 나게 만드는 이 상황을 조장하는 어떤 어두운 세력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이르지 못하는 혹은 마침내 비로소 이르는 모습을 복선을 깔아 드러내는 지점에 부제를 세워놓기 때문이다. 감독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교회는 기존의 종교를 넘어서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인간의 삶을 파악하고 새롭게 형성하고자 하는 어떤 구체적인 시도도 전개하지 않거나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그늘지고 눈물 나는 삶의 현실에 귀 기울이지 않는 그런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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