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죽 최복이 대표의 무릎경영 이야기 (3)

고난이 어째서 축복인지 알아가자 최복이 대표의 마음에 다시금 꿈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 꿈이 있어야 해......’ 사실 꿈이기보다는 간절함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70만원 받던 요리학원 일 자리조차 사라진 상황에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마음만 간절했다. 어느 날 남편에게 물었다. “내가 조그만 가게 하나를 하면 좋겠어. 그러면 당신이 사업이나 다른 일로 다시 일어나는 동안 가족이 먹고 살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러자 남편이 기다렸다는 듯이 “당신, 죽집 해 볼래?”

죽집이라는 말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소자본에 열정만 있다면 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죽집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시장 모퉁이 죽집, 오랜 전통이 있는 죽집, 여의도와 충무로의 죽집.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여기저기 앉아 죽을 먹고 있었다. ‘아니 이런 고급 손님들이 끼니 대신 죽을 사 먹는 구나’ 그리고는 어디선지 모를 근거없는 자신감에 회심의 미소를 띠며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그럼 죽집 한번 해 볼래”

최대표는 가장 먼저 친정엄마에게 달려갔다. 어려서 잣죽, 깨죽 등을 쑤어 할어버지께 드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의 비법은 단 한마디 “죽은 가마솥에 쒀야 제맛이지” 막막했다. 손바닥 만한 주방에 가마솥을 걸기는 무리였다. 아득한 마음에 지인의 소개로 종로구청 앞 ‘보름달’이라는 전통찻집을 찾아갔다. 그러고 석 달 가까이 설거지와 서빙을 하면서 죽 쑤는 법을 배웠다. 여기저기 데고 베이기 일쑤였다. 하지만 전통죽의 기본은 배웠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먹고 나면 허전한 죽이 아니라 한 끼 식사가 될 만큼 든든한 죽, 환자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보양죽, 다이어트와 여성을 위한 미용죽, 아기들에게도 마음 놓고 먹일 수 있는 죽. 최대표에게 죽은 한 끼 대용이 아니라 이미 충분한 한 끼 이상이었다. 현재 <본죽>에서 인기가 있는 해물죽, 김치죽, 호박죽 등은 그냥 만들진 것이 아니다.

2002년 2월 무렵 경동시장을 돌아다니며 좋은 늙은 호박을 골랐다. 4월쯤 되니까 늙은 호박 한 통에 5~10만 원에 약호박처럼 팔렸다. 궁리 끝에 늙은 호박 대신 단호박으로 대처해 보고 여러 가지 요리법을 시도했다. 숱하게 맛보고 다시 또 쑤기를 반복한 끝에 누구에게도 내 놓아도 자신 있는 마음에 구역예배를 드린 후 어머님과 구역식구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그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런 죽은 처음 먹어본다. 너무 맛있어서 자꾸 손이 간다”

그렇게 최대표는 매일 죽을 실습하고 가족은 평가단이 되어 메뉴가 하나씩 구체적인 레시피를 입기 시작했다. 최대표의 주방은 작은 R&D센타(research and development 연구개발센터)가 되어갔다. 그렇게 작은 주방에서 지금 <본죽>의 중심 메뉴인 15개의 죽들이 탄생했다. 현재는 국내 유명 세프를 모시고 본브랜드연구소를 통해 더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죽들이 개발되지만, 초창기 작은 주방의 15가지 메뉴가 현재 본죽 전체 매출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작은 주방의 기적. 하지만 그것은 사실 말씀의 기적이다. 최대표는 만드는 내내 최대표의 입에 말씀이 떠나지 않게 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메뉴와 맛은 나왔는데 이제 가게 이름이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기도 중에 주님께서 본(本) 이라는 단어를 보여주셨다. ‘죽의 기본, 건강의 기본’이라는 의미나 ‘본래의 맛을 고집하는 원조나 처음’ ‘오리지널’ 같은 의미가 들었다. 주님은 본죽이 지켜야 할 기업 정신 ‘건강을 채우는 죽그릇’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최대표도 나중에 알게 됐지만 본이라는 말은 국제적으로도 좋은 의미가 많았다. 이태리어나 불어로는 ‘좋다’ 라는 뜻이고, 비슷한 영어의 발음의 본(bone뼈대), 본(born탄생) 이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여기에는 복음적인 의미가 숨어 있었다. 어느날 한 크리스챤 사장님이 본(本)의 숨은 뜻을 풀어주면서 “십자가에 사람 인(人)자가 있고, 그 밑에 십자가(十)자가 하나 더 있는 형상이네요. 큰 십자가 밑에 사람이 작은 십자가를 지는 꼴(本)이니 본죽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요”

그렇게 하나님께 받은 이름을 건 본죽 1호점인 이화동 사거리 후미진 골목 허름한 38평 2층 상가였다. 하지만 그곳은 뭘 해도 장사가 안 되는 자리로 유명했다.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가 한창 가게를 열 준비를 하는 우리에게 “여기서 장사하다 망한집이 벌써 세 번째여. 으슥하니까 그냥 술집이나 혀” “새댁이 죽집 할거라고? 아픈 사람이나 죽 먹지 누가 죽을 사 먹어? 여기저기 식당마다 죽을 끓여주는데”

현실은 그랬다. 하루에 열 그릇 안팎으로 팔리는 상황이 되자 손님 한 사람이 예수님 같았다. 맨발로 뛰어가 손님을 맞이하며 온갖 “손님 어떻게 해드릴까요? 간을 빼드릴까요? 소금을 더 넣을까요? 누가 드실건가요?” 절박하지만 사실 이것은 훗날 본죽 경영의 중요한 마인드가 되었다.

아침 6시 출근, 7시 전단지, 돌아와 청소며 재료 준비, 점심 때 손님 받고, 오후엔 또 동네스티커와 전단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간절히 주는 전단지가 외면되어 버려지면 그냥 밟혀지지 않도록 다시 줍고 닦아 또 돌리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죽집이라고 허름하게 하지 않았다. 전문 카페이상의 인테리어에 양질의 재료와 정성에 어울리는 값. 그리고 돈이 아깝지 않을 양과 맛을 고수해 나가니 점점 입소문이 나서 50그릇, 100그릇이 되었다.

점점 몰려드는 손님에 요리의 기본이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상황 매뉴얼도 작성했다. 그러나 모든 상황마다 주님께 기도하며 사업을 이끌어 나가자 개업한지 7개월이 지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방송이 되었다. 방송의 도화선을 타고 얼떨결에 가맹점 사업이 시작되었고, 가맹점을 하겠다고 오는 분들에게 최소한의 가맹비만 받고 노하우를 전수하니 오픈하는 매장마다 다 대박을 냈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마다 하나님은 최대표에게 기도하게 하셨다. 그 때 마다 하나님은 땅을 흔들어 기반을 튼튼하게 하시는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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