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사장ㆍ총장 이취임식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 정창균, 이하 합신)는 지난 2월 28일에 2017학년도 입학감사예배 및 이사장·총장 이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임하는 안만수 이사장과 조병수 총장, 그리고 취임하는 박삼열 신임이사장과 정창균 신임총장은 학생 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종 화기애애하고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감사예배를 드렸다. 

이번 합신 제8대 박삼열 재단이사장은 호선하였고, 제10대 정창균 총장 또한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단번에 추대되었다. 총신대 재단이사회가 구성이 안돼 곧 교육과학부에서 관선이사를 파견하기 직전이고, 감신대가 아직도 총장선출을 못한 채 재단이사회가 분열과 갈등 중인 것에 비하면, 이번 합신의 이사장과 총장 이취임식은 매우 뜻 깊은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합신은 1980년에 총신대학교 신학연구원 교수와 학생이 집단으로 분립되어 남서울교회(당시 당회장 홍정길 목사) 지하에서 ‘합동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그후 1984년에 ‘합동신학교’ 인가를 받았고, 1996년에 신학대학원으로 인가를 받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로 개칭되었고, 캠퍼스는 수원에 있다.

합신이 총신대학교로부터 분립된 것은 1979년 9월 합동교단이 대구불법총회 이후 개혁측과 분열되면서 1980년 10월에 당시 총신대 학장서리 박윤선 교수 등이 학생들과 의기투합하여 총신대 사당동캠퍼스에서 탈출하여 시작되었다. 당시 예장합동 교단의 교권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던 이영수 목사가 총신대 재단이사회를 장악하여 간섭하는 상황에서 박윤선 학장을 비롯한 신복윤 교수 등이 도저히 정상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사임하고 뛰쳐나온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회고해보면 총신대학은 1979년 9월 교권을 좌지우지하던 이영수 목사가 대구총회 당일 오후부터 개회하기로 되었는데,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비주류에게는 통보하지 않고 나머지 주류 총대들을 오전에 총회장에 모이도록해서 자신을 부총회장으로 선출하고 폐회하고 흩어져버렸다. 오후 늦게 총회장에 도착한 비주류 총대들은 경찰의 제지로 총회장에 입장도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한마디로 호남을 중심으로 한 비주류는 합동교단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대구불법 총회로 말미암아 주류와 비주류(개혁측)로 교단이 분열되자 이를 항의하는 총신대 재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며 학장실을 점거하고 극렬하게 농성을 하였다.

그러다가 10.26으로 휴교령이 내려지고 논성중이던 총신대 학생들은 일단 농성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1980년 1월부터 농성을 주도했던 학생들 중심으로 총신대 학원민주화를 추진하여 개학후 3월에는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회장 전은식)를 부활시켰다. 그러다가 서울의 봄을 맞이하여 총신대학생들도 총신대 역사상 최초로 정치적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여 학내집회와 가두시위를 벌였다. 평양신학교 개교이래 최초의 반정부민주화 운동이 총신대학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한 총신대의 민주화운동은 5.18 상황으로 이어졌고, 당시 총신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재학생 여러 명이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에 의해 연행되거나 수배되어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겼었다.

한편 1980년 학기가 개강하자 총신대 재단이사회는 학원정상화를 위한 방안은 모색하지 않고, 1979년 가을 학내사태 주동자들을 징계하였다. 이에 총신대 재학생들은 계속하여 수업을 거부하고 김희보 학장과 김인득 이사장, 이영수 이사 등 교권주의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등 총신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 4월에 56명의 총신대 재단이사 전원이 사퇴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사장과 부이사장 그리고 당시 교단 부총회장이던 이영수 목사는 사퇴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1980년 5월 계엄령으로 인하여 모든 대학이 문을 닫았다. 또한 그해 9월에 열린 예장(합동)교단 총회 실행이사회에서 총신사태의 모든 책임을 교수들에게 전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80년 가을 예장(합동)교단 총회에서 부총회장 이영수 목사가 총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아울러 합동교단 총회에서는 총신대사태 해결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오히려 학교상황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합동교단 총회 특별위원회는 교수들과 사전에 협의도 없이 개강예배를 인도하였고, 징계할 교수와 학생들을 색출하기 위하여 일대일 심문을 했다. 그리하여 특별위원회는 5.18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다 강제징집 당한 한성천(신학과 4년)을 비롯하여 신은균(신학과 4년), 최장일(신학과 4년), 방광덕(종교교육과 2년 복학중) 등 십여 명의 학생들을 제적 및 정학에 처하였다.

이어 4인의 총신 교수들(박윤선, 신복윤, 박형용, 윤영탁)은 10월 23일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들의 동기는 교권의 횡포가 없는 상황에서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근거한 학문과 경건을 갖춘 지도자들을 양성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당시 박윤선 학장(서리)은 결코 합동 교단으로부터 분립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합동교단에 다시 연합할 것을 염두에 두고 새롭게 시작하는 학교의 이름을 ‘합동신학교’로 정하길 원했다.

1980년 11월 11일에 남서울교회(당시 담임목사 홍정길)에서 합신의 개교 예배를 드렸다. 그 후에 졸업생의 진로를 위해 교단이 필요하게 되자, 약 1년 뒤인 1981년 9월 22일에 개혁에 뜻을 같이하는 교회들로 구성되어 제66회 합신총회로 창립되었다. 그러나 합동신학원의 분립을 반대하는 목회자들의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학우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소속한 교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닌 경제적 압박과 함께 장래에 대한 불확실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극소수는 다시 총신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1981년 2월 24일에 48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 후 1982년 11월, 현재 수원의 학교부지인 22,713평을 구입하게 되었고, 1984년 12월에는 학교 본관 공사가 시작되었고, 당시 문교부로부터 신학대학원 40명의 학생을 모집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1985년 4월에 수원 캠퍼스가 완성되었고, 1990년 9월에 기숙사 생활관을 마련하였다. 1994년 3월 본관 4층 증축한 후, 2004년 3월 변화산기념도서관, 2008년 9월 설교센타를 차례로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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