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걸어가는 우직한 제자가 그리운 시대이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본헤럴드신문발행편집인, 본국제신학교 학장, 본국제기독학교 이사장, (재)본월드미션이사, (사)새길과 새일 부이사장, 벧엘의료법인 이사, 국제NGO(사)글로벌비전이사, 저서:충성된일꾼되어가기, 주기도문연구, 제사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등.   사진은 본푸른교회 북카페 전경

고도성장으로 인한 안전 불감증과 더불어 20년전에 한국에 찾아온 IMF는 국민들의 가슴을 멍들게 했던 큰 상처였다. 이 불행한 사건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안감과 막연한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우리들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미래사회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공통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미래를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인생의 몇 번의 전환점들이 있었다. 신대원 졸업을 앞에 두고, 1999년 12월에는 마음이 힘들었다. 당시에는 IMF로 인해 사회적인 분위기가 암울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슨 일을 하며 사명의 장에 있을 것인가?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신대원 입학 시절에는 오직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의 장에서 인생을 던질 것 같은 믿음으로 충만했는데, 졸업을 앞에 두고, 자신감도 믿음도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다섯 살, 네 살인 두 딸을 데리고, 어떻게 세상을 헤쳐 나갈 것인가? 신대원을 다니면서 막연히 공부만 했지, 구체적으로 어디서 사역을 할 것인가? 사역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기도나 준비 없이 3년이란 시간을 보냈던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개척교회에 대한 준비도, 전담사역에 대한 준비도, 학업을 이어갈 구체적인 준비도 모두 부족한 상황이었다. 어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고 3년이란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막연하게 살았기에, 불안과 걱정이 내면을 점점 채워가고 있었다.

1999년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새해를 맞이하면 대학원을 졸업하고 구체적인 사역 현장으로 떠밀려가야 한다. 새해를 기쁨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기쁨이 아니라 무거운 새해를 맞이한 것이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마지막에 말씀카드를 뽑는 순서가 있었다. 말씀을 뽑고 그 말씀을 보는 순간 내 가슴으로 말씀이 확 끌려 들어오면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확신을 주셨다.

그때 주신 말씀이 시편18편 19절 말씀이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이 말씀이 내 눈으로 들어오는데 살아있는 말씀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나의 청년부 교육전도사 3년 사역을 기뻐하셨다고 주님이 인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사인이었다. 나의 갈 길을 나도 모르기에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나의 인생이 어디서 살아야하는지를 정하고 계셨다. 말씀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 나를 다른 사역지로 보내신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염려와 두려움과 부담감이 한 순간에 날아가고 내 마음에 평안함과 기쁨과 감사로 가득 채워졌다.

2000년 2월 구리에 있는 지하 개척교회에 사역자가 없이 청년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있으니 나보고 가면 좋겠다고 서울신학대학교의 조갑진 교수님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교회에 와보니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콘크리트 바닥과, 인테리어가 되어있지 않은 교회, 교회 집기도 없는 교회, 전화비를 비롯한 모든 공과금을 낼 경제적인 여력이 없어서 연체로 밀려 있는 교회, 임대료도 6개월 이상 내지 않는 교회, 10대 후반 20대 청년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열악한 모습들이 내 눈에 비춰진 교회의 모습이었다. 교회의 기능을 상실한 모습이었다.

지하 교회에 머물고 있는 청년들이 한 없이 처량해 보이고 불쌍해보였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교회를 맡으면 안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하나님의 사인이 없었다면 나는 구리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환경이 너무도 열악했다. 하나님의 사인이 없이 사역지로 왔다면도 많은 어려움 앞에 쉽게 포기하거나 의심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주신 곳이기에 한 번도 뒤돌아보며 후회하며 살았던 적이 없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말씀으로 확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은 우리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할 때, 분명하게 결단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고 길을 인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인생의 길이 넉넉하고 성공적이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축복받은 인생이구나? 아주 형통한 인생이네라고 부러움을 살만한 사역지여야 하는데, 사역지는 정반대의 길이였다. 나를 기뻐하고 넓은 길로 인도한다는 주님의 응답을 받았는데. 현실은 아주 힘들고 고단한 사역이었다. 비포장도로, 앞이 철저하게 막혀있는 길, 희망의 출구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길, 얼마 되지 않은 청년들은 삶의 질서가 무질서했고, 개성이 강했고, 열등감과 아집과 고집으로 가득차 있었고, 목회자의 말을 순종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청년들은 전혀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는 불량상품처럼 보였다. 한 동안 답을 찾을 수 가 없었다. 어떻게 교회를 이끌어가야 할지 전혀 출구를 찾을 수 가 없었다. 그러나 후회나 포기나 물러서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셨고, 하나님의 뜻은 아직도 진행중이고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열악한 개척교회로 보낸 것은 잠시 비를 피하고 다른 교회로 이동하는 길목으로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열악한 교회로 보낸 것은 이들을 책임질 목회자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대안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장점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능력은 부족하지만, 견고하게 묵직하게 끝까지 버티는 그런 내적인 힘이 있기에 하나님이 보내셨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교회를 섬기면서 많은 시간을 자비량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었고, 교회에 필요한 것은 최선을 다해서 채워가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와 성도들과는 계산하지 않는다. 드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헌신과 순종의 모습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목회자는 사람과 교회와 계산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추해지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의 인생의 위대한 전환점 앞에 있을 때, 그는 '말씀을 따라'갔다. 어느날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가면 축복의 근원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다. 안정된 일터와 친구들과 고향을 등지고 방랑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앞이 정해지지 않는 미래를 향해 기쁨과 감사로 달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을 따라 가야 된다. 그래야 힘이 생기고, 방황하지 않고, 머뭇머뭇 거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왜 말씀을 따라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40장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약속의 영원성을 보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시편 1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했다.

길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길은 오직 한 길이다. 다른 길은 인생의 방향을 병들게 하거나 돌아가게 하거나 위험에 빠뜨리게 한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인도하기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뒤돌아 가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 당장 현실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길과 내 눈에 보기에 좋고, 상식에 어긋나지 않고, 보편적인 길을 찾아가는 것이 지혜롭고 시간을 절약하고 인생을 복되게 세우는 길인 것 같은데, 그것은 나의 세속적인 생각이다. 더디고 불편하지만 하나님이 가라는 길로 가는 것이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됨을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삶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시19편 7-8절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왜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인가? 영혼을 소생시키는 힘이 말씀에 완전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죄악으로 오염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순결하게 유지하는 힘은 오직 말씀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만왕의 왕이요 부활의 주님이요 구원자이시고 심판자이며 재림주이신 예수님은 누구인가? 선한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하게 인도하시는 분이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 하셨다.

말씀을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환경을 따라 살아가지 말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길이다. 세상의 방식과 규칙을 거부하고 믿음의 방식을 선택하고 대가를 철저하게 지불하고 살아가는 것이 제자의 길이다.

17년의 개척교회 현장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오직 말씀을 따라 가려고 몸부림쳤기에, 사역 현장에 대한 비교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았다. 말씀을 따라 가면, 성공이라는 세상적인 가치에 자신을 던지지 않는다.

말씀을 따라가면, 한 영혼에 대한 가치를 공감할 수 있는 여유가 늘 채워져 있다. 말씀을 따라가면 나의 필요와 비전과 요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교회의 필요, 성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찾는데 오감이 열려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말씀을 따라 무모하게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이 그리운 시대이다. 세상의 잣대나 눈이 아니라 말씀이기에 무조건 순종하고 내려놓고 헌신할 수 있는 절대적인 믿음의 소유자가 그리운 시대이다.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인데, 그렇게 살아가고자 몸부림치며 전부를 던져 헌신하는 제자에게, 오히려, 왜 이렇게 이성적이지 못해, 왜 감성적이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움이라고 오히려 핀잔을 주는 세대이다.

거룩한 결단 앞에서는 늘 뱀처럼 지혜롭게 살라는 말씀으로 묘하게 포장하고 헌신의 길을 피해가는 어리석은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편승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세계를 이 땅의 가치로 자른다면, 더 이상 하늘의 축복의 통로는 막히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따라 무모하게 자신의 전부를 다 던져서 떠나는 결단의 제자가 필요하다. 아브라함처럼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는 무모하고 바보스럽게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제자를 주님이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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