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의 색깔인 보라색 천을 십자가에 드리운 마리아의 십자가

"...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17)

성경은 분명히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며 질그릇 안에 모신 보배로운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카톨릭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마리아의 공로를 높인다. 마리아가 예수께 몸을 주었다고 한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오시는 통로에 불과한 선한 질그릇으로 사용된 것인데, 그들은 그녀의 행위를 강조한다. 그릇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불린다. 꽃이 있으면 꽃병, 쓰레기가 있으면 쓰레기통, 보석이 있으면 보석함, 담뱃재가 있으면 재떨이 등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느냐에 따라 그 용도가 달라진다. 즉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서 거하시면, 그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 거하시는 예수께서 행하시므로 남들이 보기에 예수님 같지만, 그가 예수는 아니며 그런 이를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탯속에 예수께서 잠시 거하셨을 뿐이지 그녀가 예수님을 잉태했다고 해서 즉 그녀 안에 예수께서 거하셨다고 해서 예수님과 같은 중재자나 구속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리아는 분명히 자신을 "주의 계집 종"이므로 주인의 말씀대로 따르겠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어떻게 계집종이 사람들에게 은총을 내려준다는 말인가? 어떻게 주인의 일을 종이 한단 말인가? 어찌 그릇에 담은 내용물과 그릇의 역할이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

특히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말을 듣고 마리아는 자기가 낳은 자녀들과 함께 와서 예수님을 데려가려고 했던 사람이다. 마리아는 분명히 천사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메세지를 분명히 들었다(눅 1:26-38). 그런데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여 예수님을 데리고 가려고 했던 즉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했던 과거가 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막 3:21-22, 30-31)

어디 그것뿐인가? 예수님이 열두살 때에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집에 돌아갈 때에 예수님을 챙기지도 않았다. 엄마라면 집으로 돌아갈 때에 자녀들을 점검하여 데리고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녀는 떠날 때에 아들 예수가 있는지 없는지도 점검하지 않고 하룻길이나 되는 거리를 간 다음에야 예수님이 없는 것을 알고 찾았던 것이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눅 2:43-44)

이러한 실수와 허물이 있는 마리아에게 카톨릭 신자들은 그녀가 무흠하다며 기도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리아를 존경하는 것이지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기도는 신에게 하는 것이지 존경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존경하는 사람에게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마리아가 허물 뿐만아니라 원죄도 없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까지 거짓말장이로 만들어서 성삼위 하나님이 아닌 4위 하나님을 만드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여러 이단들이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말을 많이 유포하여 우리는 그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요일 1:10)

사람들은 처음 듣는 소리에는 여러 반응을 보이지만, 많이 들었던 것을 기정 사실화 하면 과거에 반대했던 것이어도 대강 타협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동성애자는 창피해서 말도 꺼내지 못했는데, 하도 듣다보니 동성애자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더 나아가 동성결혼을 찬성하는 자를 대통령으로 세우겠다고 하는 정신나간 시대가 되었다.

성경과 심리학은 완전한 대립 선상에 놓여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 심리학을 공부하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마귀는 철저히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폭군이나 정복자들은 항상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권세를 누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심리전에 넘어가서 정복당하는 것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죽은 사람은 심리전이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가 죽고 없는 오직 예수만 있는 사람 즉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교만한 마귀의 종들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햇님이 바람을 이긴 동화처럼...

마귀는 오래전부터 기독교 안에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이세벨의 영에 사로잡힌 여자들을 교회의 리더와 더 나아가 교주로 세워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물밑 작업을 해왔다. 오늘날 미국에서 동성연애자들의 결혼이 어떻게해서 합법화 되었는가? 동성애자들이 어떻게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는가? 

미국장로교의 여자 목사와 장로들이 자기들도 소수자이므로 성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을 세워주어야 여성 인권도 높아진다는 지극히 어리석은 미혹에 넘어가서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성애문제는 기독교에서 먼저 목사 안수를 주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해 세상도 동성결혼이 정당화 된 것이다.

태초부터 세말까지 항상 여자가 문제이다. 태초에도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창세기를 시작하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계시록의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 계획을 하셨기에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죽어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인류는 죄인이어야만 했다. 아무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사람이 없어야 했다. 그래야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께서 오셔서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율법을 지켜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써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여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음을 한탄하며 두손 들고 주께 항복하라고 즉 죽으라고 주신 것이다. 이러한 멋진 시나리오 즉 인류의 모든 역사의 저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여자는 교회를 상징한다. 예수께서 여자인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죽으셨으나, 고멜과 같은 육에 속한 여자는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락의 길을 향해 달려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계속해서 아내를 용서하고 데려온다. 남편을 떠난 여자 즉 예수님이 머리가 되지않은 교회는 모두 선악과를 따먹고 우상과 영적 간음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편과 진정으로 한몸이 되었을 때에만 상호간에 힘들게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거나 분리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호세아와 고멜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아무리 여자인 교회가 똑똑할지라도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지 않으면, 육체의 열매를 맺는 음란한 고멜이 되어 이세벨의 손에 들려있는 음행의 잔을 높이 들고 가정과 교회와 온세상을 그 더러운 포도주에 취하게 만드는 것이다.

수년전에 안식교에서 개종했다며 어느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매주일 책을 빌려주는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빌려주는 책들은 대부분이 이상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개종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침입한 가라지였다. 그중의 한 책은 하나님을 여자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도 뚱뚱한 흑인 아줌마로... 

너무나 기가 막힌 그 내용을 몇몇 교인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편안한 아줌마와 같다고 생각하니 정말 은혜가 된다고 했다. 더구나 하나님의 케릭터는 과거에 노예살이를 했던 흑인이다. 게다가 외모는 뚱뚱하다. 따라서 현재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갖고 있는 여성들에게는 너무나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 책을 빼앗아 다시는 다른 사람들에게 읽게 하지 말라며 그들에게 설명을 해주었으나, 이미 하나님을 편하고 뚱뚱한 흑인 아주머니로 인식하게 된 이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2-4)

카톨릭은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듯 마리아를 마지막 하와라고 누구처럼 모방하여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미혹에 넘어가서 모르고 한 것이지만, 어쩌면 그렇게도 성경대로 가고 있는지!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금방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교인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막았던 것이며, 종교개혁자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했던 것이다.

창세기의 아담과 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아담은 너무나 다르다. 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발에 끌리는 왕의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머리털은 흰 양털과 눈 같고, 눈은 불꽃같고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 소리 같으며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얼굴은 빛나는 태양같은 분이시다. 어디 그뿐인가? 장차 철장으로 세계를 심판하고 다스리실 분이다.

그런데 마지막 하와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핍박을 받지만 끝까지 인내하여 구원을 받는 신부인 교회,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회와 세상을 음행의 길로 미혹하는 종교의 모습을 갖고있는 음녀이다. 따라서 마지막 아담이신 거룩한 예수님과 한몸이 된 교회들은 첫째 아담과 예수께서 다르듯 첫째 하와와 다른 거룩한 신부의 모습이 된다.

그러나 피조물인 마리아를 숭배하며 그녀에게 기도하는 이들을 계시록에서는 "음녀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음행의 포도주 잔에 취했다"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첫째 하와와 마지막 하와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따라서 카톨릭에서 말하는 마지막 하와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불의 심판을 받게 될 음녀인 것이다.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계 18:7-8)

Mater Dolorosa - QUELLIN, Artus I. 1650. Polychrome wood. Sint-Jacobskerk, Antwerp - 마리아의 십자가 밑에 황후의 왕관을 쓰고있는 마리아.

근래에 카톡을 통해 성경 66권을 노래한 동영상이 수없이 오고간다. 그런데 그 동영상을 보면, 뒷 배경에 보라색 M자 천이 십자가에 드리워진 마리아의 십자가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마리아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성경 66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한 것이므로 좋게 생각한다.

과연 좋은 게 좋은 것일까? 그저 예배를 위하여 예술적으로 멋지게 장식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강대상에 올려도 괜찮을까?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왜 하나님께서 만들게 하셨던 놋뱀을 부숴버렸을까? 

사순절의 색깔인 보라색 천을 십자가에 드리운 마리아의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의 만남! 이런 것이 보이지않는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을 깨어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단을 과연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옳을까? 이단이 무서운 것일까, 교회 안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끼어든 사탄의 문화가 더 소름끼치게 무서운 것일까? 그걸 알면서도 대강 넘어가려는 당신의 마음이 이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이 아닐까?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hold fast)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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