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에스더 목사, 뉴욕퀸즈교회 담임, 본헤럴드 미국지사장

마 6:5-6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 순종은 들을 귀가 있는 것

순종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말을 잘 듣는다"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순종하라"는 말씀이 없고 "들으라(Listen, hearken)"라는 명령문이 나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려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잘 듣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청각적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우리를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창 34:17)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23)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사 46:12)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시 34:12)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호 9:17)

순종이 말을 잘 경청하는 것이라면, 불순종이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 듣기 싫어하거나 말을 끊어버리는 사람을 불순종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구제를 하고 기도를 하며 선을 행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모른다면 그는 불순종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듣고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잠언을 보면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 1:8),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잠 4:1)“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잠 5:7)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잠 7:1, 24),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잠 8:32)라며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가진 자의 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사무엘이 사울왕을 향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하며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죽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라고 말씀합니다.

(2) 강제로 골방에 들어가 무릎 꿇는 요나

세상에서 집을 짓는 건축자들이 짓지 못하는 집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똥고집”입니다. “똥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하나님도 손을 놓으실 때가 많습니다. 다행히도 요나와 같은 사람은 물속에 집어던지고 그것도 모자라 큰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서 그의 똥고집을 꺾어서 사역을 시키셨지만, 사울왕의 경우는 그의 완고한 고집을 꺾지 않으시고 그를 버리셨습니다.

요나와 사울왕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상태가 골방에 들어간 것이 아니며, 설사 골방에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문을 닫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지 못하고 인본주의적이며 세상적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요나와 사울왕의 생각이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결코 나쁜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에 가서 선교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또 적군인 블레셋 군대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선지자 사무엘이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으니 전쟁을 하러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적군이 코앞에 있는데 전쟁하러 모인 사람들도 떠나가고 제사는 드려야겠고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3) 사울왕의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

사울왕은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꼭 제사장이 와서 제사를 주관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예배를 인도하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말입니다. 더구나 제사장인 사무엘은 제사를 드려야할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만약 목사님이나 예배 순서를 맡은 사람이 예배시간에 늦게 오면 어떻게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특히 예배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오지 않아서 예배드리러 왔던 교인들이 기다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목사가 예배 시간에 늦을 수가 있어?"라며 한마디씩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된 삶을 살기 때문에 시간을 조금만 안 지켜도 무슨 큰 일을 저지른 것처럼 비난을 쏟아부을 때가 많습니다. 어느 교회는 아예 예배 시간이 되면, 늦게 오는 사람은 예배당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문을 잠그는 곳도 있습니다.

사무엘이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사울왕은 자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지요. 인간적으로 볼 때에 그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며 옳은 판단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치에 맞고 지혜로운 생각인 것 같아도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치에 맞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느냐를 보지 않으시고, 이치에 맞지도 않고 비상식적이어도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보십니다. 

결국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즉 예배시간에 늦은 목사를 기다리지 않고 제사를 드린 사울왕은 제사를 드린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내생각과 너희 생각이 다르니까 제발 내 말 좀 들어라. 그래야 복을 받는다. 너희가 판단하여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4)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

사울왕이 제사를 지낸 것은 제사장이며 선지자인 사무엘을 믿지 못한 것이며 그것은 사무엘의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제사장보다 전쟁에 나가 싸울 사람들을 더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가 사무엘을 신뢰했다면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 나가야 할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끝까지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즉 군인들이 전쟁을 해야하는데, 그는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보다 도구를 더 믿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구원과 먼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하나님은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막을 만들 때에나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어떻게 무엇으로 만들라고 치수까지 정확히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까지 세밀히 그 형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비록 전쟁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제사장이 주관해야하는 것을 무시하므로 그렇게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한 번 하나님과 영적 리더를 무시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자기 멋대로 살아가기가 쉬워집니다. 첫 발을 떼기가 어렵지만, 일단 첫 발을 떼면 그 다음 발은 저절로 따라오며 그 다음엔 쉽게 뛰어갑니다. 사울왕은 자기 멋대로 제사를 드리고 난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후에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취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또 그 말씀을 무시하고 좋은 것들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서 그랬다고 거짓말까지 합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사울왕의 욕심을 모르겠습니까? 그때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사울왕을 꾸짖었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삼상 15:19)

우리는, 귀하고 좋은 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 생활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버리라고 하시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 생각에 선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악한 것이라고 하시면 악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말렉 사람들이 갖고있던 좋은 것들을 버리지 않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없이 내가 임의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혼자 생각하도록 부추긴 사탄은 사울왕에게도 똑같이 혼자 생각하도록 부추겼습니다. 결국 자기 생각대로 제사를 지낸 사울왕은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던 것입니다.

(5) 당신은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보다 그분의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이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을 바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사무엘 선지자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고집이 센 것은 죽은 우상에거 절하는 죄와 같다”라고 하면서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그때 사울왕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입니다. 즉 그가 누군가의 말을 듣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골방에 들어가 성령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골방의 문이 열려진 틈으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면 마귀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고, 또 듣기 싫어한다면 이미 우리 자신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버리신다.

우리는 주일에 아무 교회에 가서 예배만 드리면 크리스천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울왕처럼 제사를 드린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나 기도회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예배 이전에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인처럼 형제나 가족을 미워하면서 드리는 예배나 기도를 하나님은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그런 예배는 절대로 받지 않으십니다. 

또한 사울왕처럼 하나님의 종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만족케 하는 예배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를 하며 교회의 모든 공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예배를 드릴지라도 그 예배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딴 생각을 하고 있다면,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화를 끝낸 다음에는 상대방의 말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내가 한 말만을 기억합니다. 이런 경우는 대화를 한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상대방에게 주입시킨 경우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기도를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고,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만을 바랍니다.

사울왕도 그랬습니다. 분명히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뒤에 전쟁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제사를 드린 뒤에 전쟁을 하라는 말을 분명히 들었고 그것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방법면에 있어서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 잘 들어야 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 대충 듣거나 잘 듣지 못하면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잘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저도 가끔 영어를 들을 때에 ‘not’이 들어간 말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가 듣는데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먼저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7) 보이는 골방은 골방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할 때에 외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골방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또 하나의 외식적인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집안에 골방을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기도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외식하는 기도를 한 가지 더 추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렇게 기도의 골방을 만들어놓기 때문에 진정한 골방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하고 있고, 또 기도의 방까지 만들어서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로 필요한 골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모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실 자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도실을 만들어놓고, 릴레이 금식기도를 하고, 40일간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지만 정작 그 안에 나만의 은밀한 하나님과의 대화의 장소와 시간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부분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죽은 자이며 이미 지옥에 가도록 심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분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뜻과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기도가 되는 것이며, 그러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만나주시며 응답해주십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절대로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기도나 선을 행하지 말고,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 기도와 선을 행하는 우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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