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목사 서울신학대학교(M.Div, Th.M, Th.D)본푸른 교회담임목사, 본월드미션(재)이사, 본국제기독대안학교이사장, 본국제신학교학장, 새일과 새길(사)부이사장, 본헤럴드 발행인.

목회란 무엇인가?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어쩌면 너무도 막연한 생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목회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정의를 묻는다면 서로 다른 색깔과 다양한 모양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의 목회철학이 더 낫고, 어떤 분의 목회철학은 좀 더 질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그 기준점은 없다고 본다. 주님의 거룩한 나라를 이땅에 세우고자, 일꾼으로서 헌신과 순종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고 있다면 가는 길이 달라도 모든 사람의 목회철학은 모두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신학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런 목회자가 되겠다는 소원을 주님께 드리며 지금까지 간직하며 사명의 길을 헌신하며 걸어왔다. 어쩌면 목회에서 우왕좌왕 하지 않고 늘 소신 있고 깨끗하게 살아오게 된 것은 젊은 시절 나름대로 목회에 대한 정의를 내렸기 때문이다.

나는 들꽃의 삶을 살겠다고 고백을 했다. 들판에 다양한 들꽃이 흔하게 피어있다. 들꽃은 환경에 좌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자리가 길가든, 기름진 밭이든, 산속이든, 가시나무속이든, 바위틈이든 열악한 장소에 관계하지 않고 떨어진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들꽃의 삶이다. 목회란 들꽃이라고 신학을 접하면서 결론을 하나님 앞에 내렸다. 주님이 바람 불어 놓는 곳이 어디든 나의 목회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지에 대해서 후회나 불평이나 원망이나 방황을 하지 않았고, 오직 주님 앞에 제가 무엇을 내려놓기를 원하시는지요. 주님의 뜻을 찾는 행복한 여정이었다. 항상, 주님, 감사합니다. 이 사역지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곳에서 주님의 영광이 회복되게 하소서라고 늘 기도의 시간을 정직하게 드리기를 좋아했다.

1명의 성도를 위해서 교회를 지키겠다고 결단했다. 지하실에 개척을 하면서 아내와 함께 이야기를 했다. 한 명이라도 교회에 와서 나를 목사로 부른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우리 부부가 열심히 일해 교회 임대료와 관리비를 냅시다. 나의 말에 아내는 좋다고 하면서 13년 동안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운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며 드렸다. 교회를 위해드린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다. 1명이 목회 철학이기에 목회에 실망과 좌절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늘 교회는 1명이상 모였기에 입가에는 웃음이 넘쳤고 입속에서는 찬양이 흘러나왔다.

비 성경적인 방식으로 성도들의 재산이나 헌신을 이용하는 어리석은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주님께 고백했다. 나는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선한 사역자가 되겠다고 늘 기도했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예수님이 맡겨준 성도들을 위해 나의 보화를 깨뜨린다는 것은 너무도 소중한 추억이며 기쁨이다. 성도들에게 무엇을 얻기를 원한 적이 없고, 늘 성도들을 미리 앞서 여러모로 섬기며 살았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메시지가 너무도 귀하기에, 성도를 예의 있게 섬기면서 더 큰 주의 돌보심을 경험했다.

나의 마음속에 한결같이 떠나지 않는 단어가 있다면 ‘충성스런 일꾼’이 되겠다는 결단과 의지이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힘이며 원동력이며, 나를 나 되게 만들어가는 이유이다. 일꾼이란 언어를 좋아한다. 충성이란 언어도 좋아한다. 나를 부르시고 훈련시키시고 주님의 생명이신 귀한 양떼들을 맡겨주셨는데, 그 양들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고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존귀한 일이다. 그 귀한 사역을 위해 13년간 자비량으로 교회를 섬겼다.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미련하게 살았다. 그 삶이 나는 기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

필자는 자녀들이 6살, 5살이 된 딸들을 데리고 교회개척을 하였고, 교회 개척을 하는 순간부터, 아이들은 사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 세월이 지나니, 큰 딸도, 작은 딸도 대학을 들어갔다. 아이들에게 늘 말했다. 아버지가 강남에 부자 교회 목사가 아니고, 작은 교회 목사이니, 너희들은 학원을 다닐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를 위해서 먼저 헌신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에게는 사교육의 혜택을 주지 못했고, 아이들의 옷도 물려받아 입었다. 아이들에게 사준 기억이 거의 없다. 아이들과 함께 그 흔한 여행을 해본적도 없다. 늘 아이들은 집만 지키며 살았다. 그런데도 부모에 대해 원망도 없이 잘 자라주워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부모가 모든 물질과 삶을 먼저 교회를 위해 다 드리는 것을 알기에, 아이들은 그것을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당연히 목사는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나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거룩한 유산인 것을 나는 힘들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40세에 예수님을 만나고 강원도 산간벽지에 기도원을 설립하신 후 일생동안 산기도 하시며, 자비량으로 병자들을 돌보며 헌신과 순종의 삶을 사셨다. 일생동안 구질구질한 옷을 입고 사셨다. 허드렛일을 하는 머슴처럼, 일꾼으로 사셨다. 나는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왜, 저렇게 미련하고 바보스럽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버지를 이해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세월이지나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 나도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순종하는 것이 편안하다. 일꾼은 일꾼의 옷이 있다. 일꾼은 화려한 파티복 차림으로 손님처럼 일을 할 수 없다. 일꾼은 일하는 복장이 있다. 그래야 편안하게 일을 할 수가 있다. 나는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아주 편안한 옷을 입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일생을 나의 아버지는 편안한 옷을 입고 사셨다. 그 아버지가 늘 그립고, 보고 싶다. 아버지가 걸어가셨던 그 길을, 나도 편안한 옷을 입고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일꾼이다. 일꾼에게는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오직 충성스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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