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에 기초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 설교]

고린도후서 5:13~15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불신자들을 향해서는 영원한 불못으로 떨어뜨리는 심판이 될 것이지만, 신자들을 향해서는 그들의 믿음의 삶에 대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최종적인 심판으로서 각 신자의 영원한 영광을 결정합니다.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0-15)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

그러므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얼마나 준엄한지 사람들에게 알려주면서 신앙 양심에 따라 거룩하게 살 것을 당부합니다. 절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주의 심판대 앞에서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게 된 배경은 거짓 사도들의 활약입니다. 그들은 더러운 이득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침투하여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탁월한 간계함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아쉽게도 고린도 교회는 그들을 분별하는데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도리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거짓 사도들의 말에 속아서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하여 진실하고 거룩한 양심을 가지고 행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기억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향해 진실한 마음을 지닌 자들마다 거짓과 허영에 빠진 거짓 사도들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은 영혼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주의 사도들과 종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 오직 복음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시키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1-14)

고린도후서 5장 12절에서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는 말은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저항하게 하려는 것이다.” 또는 “대적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은 고린도 교회 배경에서 볼 때, 자칭 큰 사도들인 거짓 사도들입니다.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5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

12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3-5, 12-15)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과 거짓 선지자들을 비교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았다고 자랑하였고,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추천을 받았다고 자랑하였으며(3:1), 환상을 본 것(12:1-7) 등을 자랑하지만 그 자랑은 자신들의 영달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무익한 자랑(12:1)을 하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만, 바울은 어떠한 외적인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3:1-6). 그는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거나 군림하기 위하여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의 종이 되었음을 선언했습니다(1:24; 3:5; 4:2, 5).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이 이러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들의 진정한 사도인 바울을 자랑하게 될 것이며, 반면에 간교한 거짓 사도들을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복음에 의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라면 자신 안에 있는 신앙 양심에 진실하여질 때 바울과 주의 참된 종들을 믿고 사랑하게 될 것이지만, 겉으로 외식하는 거짓 사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서는 그들의 정체를 알고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루는 본문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3-15)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강권되어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그의 삶을 움직이는 가장 크고 중요한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는 어디서 오는가 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러므로 신앙 생활의 모든 힘과 동기와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14절을 원어를 통해서 보면,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위해 죽으셨고, 따라서 모든 것이 죽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라고 말합니다. 즉, 성도들은 새롭게 열린 메시아 시대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이는 나를 사랑하사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강권함을 받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거듭난 사람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자신을 위한 종교 생활은 가능할지 모르나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온전한 신앙 생활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5절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뚜렷한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의 시작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자기 부정” 또는 “자기 부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해야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신비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반대로 무엇이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까?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알아야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란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삶을 말합니다. 성경은 자기 사랑은 말세의 특징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딤후 3:1-2). 
이는 나의 삶의 모든 결정의 중심, 모든 결정의 목표는 내 자신의 영광이며 또한 나의 모든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은 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결코 주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1, 42, 44).

요한은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삶은 세 가지의 욕구를 채우는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한편 야고보 사도는 세상을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삶이라고 증거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삶이라고 묘사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이와 같이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은 언제나 궁극적으로 육에 속한 열매를 거둡니다. 그 열매는 썩어질 것이기 때문에 죽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은 죽음과 함께 완전하게 무가치하게 되고 그러한 삶은 허무한 삶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나아가 자기 사랑의 열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열매입니다. 바울은 자기 중심적인 삶의 열매를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갈 5:19-21).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위한 삶은 교회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더욱 확장하기 위한 봉사일 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주의 몸 된 공동체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한 삶은 성경 공부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자기 만족이며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자기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을 만나 친절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친절은 당을 지어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각기 제멋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결론적으로 바울은 불신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구약 성경에는 자신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 아합 왕이 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 왕으로서 자신만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아합왕의 아내는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었습니다. 이세벨 왕비는 바알신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우상과 사치와 매춘과 음란을 끌어들였던 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샘이 많은 독한 여자였습니다. 이세벨 역시 자신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여인으로써 인기에 중독 되어 있었고 화려한 연예가의 왕비로 이름내기를 좋아하던 여자였습니다.

열왕기상 21장을 보면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서로 작당을 하여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을 빼앗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날 아합 왕이 길을 지나다가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 탐욕이 생겼습니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아합왕에게 꽂힌 것입니다. 그는 나봇에게 가서, 돈을 줄 테니 그 포도원을 팔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그 포도원은 대대손손 부모로부터 받은 포도원이며 그 포도원을 파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돈을 주어도 팔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봇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그 포도원을 팔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합은 그 포도원을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없게 되자 집에 가서 근심을 하며 한숨을 내쉽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사정을 고자질 하는 작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떼를 쓰고 있습니다.

이세벨이 수상하게 행동하는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 왜 이렇게 힘이 없이 불쌍하게 누워있습니까? 어떤 놈이 당신을 귀찮게 합니까? 말만하세요.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이때 아합은 아내에게 나봇을 이릅니다. 
“여차 여차해서 나봇의 포도원이 너무 좋아 보여서 팔라고 하니 여차 여차 부모로부터 내려온 땅이며 율법에 어긋난다고 팔 수 없다고 했소.”

이세벨이 장담합니다.
“아니, 나봇 이놈이…. 여보 걱정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자, 제가 당신에게 약속할테니 이제 진지나 드시와요.”

아합은 아내만 믿고 신이 나서 일어나 밥을 먹습니다.

그 다음 날 이세벨은 깡패 두 놈을 돈으로 매수하여 나봇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도록 합니다.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을 들었소.” 
“나도 들었소.” 
결국 나봇의 동네 사람들이 율법에 따라 나봇을 돌로 쳐 죽입니다. 나봇이 죽자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국고로 돌려 버립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아합 왕은 돈 안들이고 고생도 안하고 나봇의 포도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합왕은 계속 이기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22장을 보면 아합은 자신이 원하는 데로 말해주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아합은 아람과 전쟁을 치러 길르앗 라못이라는 땅을 빼앗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에 아합왕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400명을 불러 전쟁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그러나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은 아합왕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왕이 원하는 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왕에게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들이 대답합니다. 
“아합 왕이여! 당신의 군사가 분명히 승리할 것입니다."

이때 아합과 동맹을 맺고 있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들이 거짓 선지자들인 것을 눈치채고는 여호와의 진실한 선지자를 꼭 좀 불러오라고 부탁합니다. 아합은 찝찝한 가운데 할 수 없이 참 선지자 한 명을 불러옵니다. 바로 미가야라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를 데리고 오던 아합의 경비병은 미가야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다른 사람처럼 기분 좋은 말로 왕을 기쁘게 해 주시오. 그래야 우리도 좋고 당신의 신변도 안전할 것 아니요.”

그러나 아합왕 앞에 선 미가야는 사실대로 진실을 말합니다. 
"이 전쟁을 치르면 전쟁에서 완전히 패하여 당신도 망하고 백성들도 망할 것입니다." 
이때 400명의 거짓 선지자 중에 시드기야라는 선지자가 나와서 아합왕 앞에서 미가야의 뺨을 때립니다. 아합은 당장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아무런 먹을 것을 주지 않는 등,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의 사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아합! 그리고 자신의 비위를 맞추어주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견디지 못하고 미움과 분노를 터뜨리는 마음! 이러한 현상은 죄로 물든 자기 사랑의 감정이 더욱 커지면서 자신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아주 심하게 분노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릇된 미움은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오직 이러한 이기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망상을 누군가가 아부해 줄 때에야 기뻐합니다.

하지만 결국 미가야의 예언처럼 아합왕은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를 개들이 핥아먹고 나머지 피는 창녀들이 목욕하는 냇가로 흘러갑니다.

열왕기하 9장을 보면 지독한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던 이세벨의 최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세벨은 성 위에서 산 채로 땅바닥으로 던져져서 그 몸이 박살이 납니다. 높은 성에서 떨어진 이세벨의 몸은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다 가루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개들이 와서 이세벨의 시체마저 뜯어 먹습니다.

이처럼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비참한 끝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이기적인 삶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자신을 위하여 사는 이기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이기심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를 원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기심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이 죽든, 망하든, 피해를 입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돈, 명예, 인기, 쾌락, 내 세력을 얻기 위하여 남의 삶에 고통을 주고 공동체에 피해를 입히는 삶이 이기적인 삶이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인 것입니다.

신약으로 오면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전형적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그 부자는 멋진 인생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밭에 소출이 풍성하니 이제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를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의 인생 계획의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즉, 자기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고 생각하면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이러한 이기적인 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 영혼을 오늘 밤에 취하리니 네가 예비한 너의 모든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자기 중심적인 삶의 어리석음을 야고보 사도가 지적합니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3-17)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이 말은 “나도 과거에 역시 그러했다. 나 자신의 의를 위하여 애써 수고하였다. 내가 나의 인생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주의 사랑을 알고 나니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이처럼 누구든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한다면 반드시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능력은 자기 부인에서 시작합니다. 구원을 받을 때도, 믿음 가운데 살아갈 때도 '자신의 경험과 이성과 생각을 부인'해야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손길이 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주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였습니다. 한편,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은 자기 의로 교만했던 자였지만 부활하신 주를 만난 후에 자기 부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진정한 자기 부인의 시작은 자신의 마음의 부패를 깊게 깨달으면서 시작됩니다. 그 모든 타락의 중심이 바로 내 자신이며 내 영광을 구하는 이기심인 것을 깨달을 때 끊임없이 이기심을 회개하는 가운데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31절처럼, 자신의 악한 인생을 기억하고 자신의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자신을 밉게 보면서, 로마서 7장 18절처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 오 주여 저를 도와 주소서.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주를 붙드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 부인을 하는 자들은 진심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 115:1).

지난 과거에 내 자신을 위하여 살았던 삶은 오직 죄악과 비참만 남긴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떠난 삶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제부터는 자신을 부인하며 자아를 죽이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자들은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향한 존경과 신뢰가 깊어지게 됩니다. 그분의 영광만을 높이길 원하는 열망이 더 커지고, 이는 다시 더욱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참으로 주를 알고자 합니까? 그 안에서 발견되고자 합니까? 그렇다면 바울의 권면을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자기를 부인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없는 자기 부인은 공허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인간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 영혼에는 청명한 하늘처럼 주의 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할 때,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의 깊이를 알 때, 우리의 마음과 삶은 주의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께서 이미 승리하여 놓으신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겨진 그 전쟁은 우리가 예수께서 승리하셨던 방법과 똑 같은 방법을 사용할 때에만 승리가 보장됩니다. 즉, 십자가를 지는 방법으로 승리합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주를 바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승리를 우리의 삶 속에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우리의 남은 삶이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앙망하며 따르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 주의 영광을 높이여 하늘의 풍성함을 소유하는 그러한 복된 주의 백성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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