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4일 한국에서 장례식

다음은 지난 6월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일보 발행인이었던 故우병만목사의 한국에서의 장례식을 그의 절친 김진석 목사(헤아림 커뮤니티 Hear-I'm Mission Community 대표)의 스케치로 소개한다. 

지난 6월 2일에 한국행 비행기를 탄 우목사는 14시간의 비행시간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 땅으로 돌아가 잠을 자다가 소천되었다.

오늘은  故우병만목사의 발인과 하관(화장)이 있는 날이다. 지난 밤에 9시부터 10시가 넘도록 유족을 위한 위로 예배를 드렸다. 예배는 "내 주의 은혜 강가로"를 권은애사모(찬미선교단 싱어)가 선창한 후 유족과 함께 부르며 김진석 목사의 인도로 시작되었다. 박재환목사(주님의 숲교회, 파워프리칭대표)의 기도에 이어 김진석목사가 요한계시록 21장1~4절을 본문으로 "생명의 강으로 가는 길이란"의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최재영집사로부터 시작된 故우병만 목사 환송사는 끝없이 이어졌다. 참석한 찬미 옛 동료들이 고인에 대한 추억과 신앙과 성품과 그의 삶을 세밀하게 나누며 유족을 위로하고 고인의 삶을 기렸다.

고인의 친형 우병화장로는 모든 환송사를 녹음했다. 우장로는 동생을 핍박하다가 제일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서 가족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우병만목사의 미션 즉 마지막 바램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예배를 마치기 전에 유족인 장남 규하군과 차남 석하군에게 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놀랍게도 석하군은 아버지의신앙과 삶을 통하여 유산으로 물려받은 신앙과 사역을 자신은 더욱 뛰어난 신앙과 사역자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것이라고 다짐했다. 석하군은 고생만 하다가 소천되신 아버지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지만 위로예배에 참석한 찬미선교단 멤버들의 환송사를 듣고, 아버지는 무모한 삶이 아니라 값진 믿음의 삶을 살았던 분이라는 것을 알게되어 감사한다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천국에서 마음껏 찬양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셨음을 믿고 확신한다고 고백했다.

규하군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고 천국가셨으므로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신앙과 사역을 하겠다고 했다. 규하군의 다짐을 들으며 그의 앞날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실 여호와이레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함께 예배한 자들은 故우병만목사의 영정사진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천국에서 만날 고인을 바라보며우리도 믿음으로 승리하자고 다짐했다. 언젠가는 천국에서 그 생명의 강가에서 그 은혜의 강가에서 함께 찬양할 우병만목사가 먼저 가 있기에 그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 인생의 시간이 매우 짧게 느껴질 것은 확실하다고 선포하고 예배를 마무리 하였다.

 

감사하게도 길고 긴 시간동안 예배를 드릴 때 다른 조문객들이 오지 않아서 마음껏 예배하며 성령의 위로하심의기름부으심을 경험하였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고백하기를 위로의 예배를 통하여 성령께서 조문객들과 특별히 남겨놓은 두 아들 규하군과 석하군의 마음을 깊이 터치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행하시고 평안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린다고 고백했다. 

위로예배 뒤에도 한참이나 은혜로운 담소를 나누고 늦은 밤길에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날이 밝아 발인과 하관이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 장례식이 끝나면 미국에서 메모리얼 예배가 진행 될 것이다. 남은 장례의 일정 중에 악한 영의 시험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예식이 되기를 간절히 주 안에서 소망한다.

故우병만목사의 발인이 있던 날 짙은 구름이 낀 하늘은 하루종일 비를 내렸다. 평소 가깝던 김동호 목사의 집례로 발인예배는 은혜롭게 진행되고 함께한 조문객은 눈물을 감출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천국환송감사와 다시만날 것을 기약하는 잠시 이별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한 평생 친구와 동료와 이웃에게 주의 사랑을 퍼부어 주었던 우목사이기에 조촐하고 쓸쓸한 발인예배였기 때문이다. 

우목사는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10대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족들의 핍박속에서 출가하여 교회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일찍 신학에 입문하였다. 평생을 죽음보다 두려운 외로움과 고독함 속에서 그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베풀면서 그 외로움과 고독함을 씻어 냈다.

가족에게 버림 받은 그를 가장 아프게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별스럽게 에수님을 전하고 미친듯이 사역하는 그를 힐난과 비난으로 핍박하고 필요할 때는 친구요 그렇지 않을때는 원수처럼 달려드는 수많은 무리들속에서 그는 언론을 붙잡고 자신의 신앙에 균형을 이루고자 애썼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해해주고 용서하고 세워 주었고 가난하고 불쌍한 은퇴한 노년에게는 무조건 달려가서 넘치는 사랑으로 채워 주었다.

그는 병마를 얻고 난 뒤에 살고자 뛰지 않고 죽도록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투병 중에도 그의 병상은 사무실이었다. 자신의 몰골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보이지 않게 아무도 모르게 삶을 정리하며 사역들을 매듭지어 나갔다.

투병 중에 이룬 사역은 
 ㅡ 찬미30주년 기념집회
 ㅡ 말씀 찬양 세미나 
 ㅡ 사랑의 후원금 전달 
 ㅡ 장학생에게 컴퓨터 
 ㅡ 찬양팀에게 장학금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수 많은 일들을 故우목사는 자신의 생명의 분초를 담아서 사역을 했다. 그런 그에게 발인예배의 자리는 쓸쓸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하늘도 비를 내리고 자녀를 위해 우시는 하늘 아버지의 눈물처럼 하루종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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