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떠난 감사여행 (8) -임승훈 박사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필자가 과거에 감사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특히 학업, 등록금, 진로, 취직, 진급 등 내 맘대로 안 될 때 더욱 그렇다. 대학원에 등록하고 교육담당 파트타임으로 청소년을 지도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연말에 호봉과 사례를 조정할 때 나의 경우를 보니, 엉터리도 그런 엉터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임금 착취나 다름없었다. 결혼도 하고 대학원생인 나를 이럴 수가... 하면서 대표에게 항의해 보았으나 막무가내 식이다. 단칸 자취집에 돌아온 나는 친구들과 같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한숨 섞인 하소연을 했던 기억이 난다. 감사를 잃었음이다.

그때 친한 친구 한 녀석이 이런 말을 하였다. 지금의 보수는 네 생활과 정도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분이 너의 태도를 보고 있을 거다. 그러니 나중을 기약해보자. 그에게 푸념을 한 기억이 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나는 친구들과의 비교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 세상이 ‘내 맘대로’ 돌아간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거야 말로 큰일이다. 그런데 내 맘대로 안 된다고... 감사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염려, 불안,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아마도 염려와 불안만 떼어놓고 살아도 한평생 한숨 없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감사를 잃어버린 것일까? 감사운동에 대한 이유서인데, 감사운동은 먼저 ‘나작지’ 운동이라 하겠다. 나를 회복하고 나로부터 시작하며, 작은 것을 회복하고 작은 것부터 실천하며, 지금을 회복하고 지금부터 실행하자는 운동이다.

첫째, 감사는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나를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를 잃어버린 사람은 세상도 잃는다. 나를 잃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잃지 않는다. 나를 찾은 사람은, 정확히 말해 나의 존재 이유를 찾은 사람은 약간의 어려움이나 고난도 잘 견딜 수 있다. 감사하는 일은 큰 힘을 얻으며, 죽음의 유혹에서도 견디고 이기는 힘은 감사가 제일이다.

그런데 나를 잃는 일은 단번에 잃는 것이 아니다. 일단은 중독이 되고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나를 잃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중독이 되고도 좋은 친구와 멘토, 또는 귀한 상담가와 영적 선생님을 만난다면 그의 권면을 붙들고 헤쳐 나올 수가 있다. 힘든 과정이지만 중독자가 붙잡을 의지(힘)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며, 사회체계 내 좋은 사람을 영적 멘토로 둔 사람만이 살아 나올 확률이 크다.

감리교의 한 친구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서 잘 나가던 직장과 행복하던 가정을 깨뜨릴 뻔했다. 죽음의 유혹, 동맥을 자르는 자해의 유혹, 인생을 포기하는 낙담의 유혹에서 헤매었다. 어느 지인의 소개로 감사 기도원 원장을 만나고는 감사의 유익을 체험하였다. 감사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어느 알코올 중독자의 죽음」과 감사 책 「감사, 그 놀라운 이야기들」을 집필하였다. 그가 임효주 목사다. 필자는 임효주에게서 감사의 마인드를 배웠다. 학습은 수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때는 내가 영적으로 고갈현상이 다가와 번 아웃되어 있던 때였다. 감사가 내게 그 어떤 약보다도 참으로 보약이었다.

땅 한 평에 목숨 걸지 말자. 집 한 채에 목숨 거는 일도, 로또에 목숨 거는 일도, 투전판에 목숨 거는 일도, 골프 내기에 목숨 거는 일도, 쾌락에 목숨 거는 일도, 술 많이 먹기에 목숨 거는 일도 모두 부질없다. 세상의 것은 거의가 다 중독성이 있다. 땅 사고, 집 사고 물질에 목숨을 걸고 돈만을 따라다니는 사람은 언젠가 사기꾼에게 걸려들게 마련이다. 정당한 대가를 논하고 노동의 대가로 물질을 마련하려는 게 아니라. 일확천금을 꿈꾸기 때문이다.

해방 전에 이북에서는 금광산 노다지에 전 재산을 팔아 투자하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김○○ 박사의 부친도 어렸을 적에 금광산에 투자해 돈 벌겠다고 나섰다가 모든 가산을 탕진하고는 가출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 사람은 아내를 잘 둔 덕에, 남매를 평양과 서울 대도시에서 공부시키고 해외까지 유학시켜 박사, 교수, 장관, 총장으로 키운 경우이지만 대부분은 이런 경우 소생불가(蘇生不可)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정선 땅에 어려운 조손, 한부모 가정을 지원하고 돌보기 위해 방문했던 한 사업가가 있었다. 호텔에 묵던 중 카지노가 무엇하는 곳인지 구경이나 하자고 내려갔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기업을 송두리째 날리고 말았다. 1년 새에 20억 이상을 다 날렸는데 너무도 아까워 3년째 집에 내려가질 못하고 있었다. 카지노 측은 그가 왕년에는 VVIP였기 때문에 잠시는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잠시 손님 데려오고 소개하는 역할을 맡기고 용돈을 주었지만 이젠 찬밥신세가 되었다.

글쎄 이 중견기업의 사장님, 투전에 중독되니까 미국에 살던 딸이 죽었다는 부고 소식을 듣고도 아비가 미국 간다고 죽은 딸이 살아나느냐며 아직도 정선을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참으로 중독은 무섭다. 중독은 인간을 비이성적으로 만들고 몰상식으로 내동이 친다.

머리가 비상한 고향의 한 어른이 있었다. 그는 한학을 배웠을 뿐 아니라 동리에 큰 잔치인 어느 집 상량식이나 초상 등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귀빈 대우를 받는다. 새집의 대들보에 멋진 글귀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알코올에 중독됐다. 일을 안 하고 놀고먹는다. 논 다랑이와 인근 밭들에 잡초가 무성해도 갈아엎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온 동네에 생일자 리스트를 수첩에 적어가지고는 이른 새벽 맨 앞자리에서 상을 받는다. 나중엔 동네 아이들에게까지 놀림을 받았다. 둘째도 중독으로 유명을 달리했고, 막내도 알코올 중독으로 객사했다. 중독은 자기를 저버린다. 그래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나를 찾으면 감사를 회복하고 감사가 회복되면 세상이 읽힌다. 중독이 없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독서이고 둘째는 감사이다. 독서는 인성과 인문학의 시작이고 과실을 일구는 과정에 비유된다. 그런데 감사는 결실을 맺는 작업이다. 매듭을 짓는 몸짓이기에 매우 귀하다.

 

둘째, 감사는 작은 것부터 회복하는 운동이다. 현대인은 작은 것들을 잃었다. 큰(많은) 것만 선호한다. 작은 것을 묵상하면 살아날 수 있다. 작은 것에 충성(실)하면 큰 것에 쓰임 받고 결국은 성공할 수 있다. 작은 것에 감사하면 진정 감사를 회복할 수 있다.

성경은 말한다. 작은 것이 중요하다고, 작은 것에 충성하면 큰 것에도 충성할 수 있다고, 작은 것에 정직하지 못하면 큰 것에도 의로울 수 없다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주인은 말한다.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19:17).

현대인들은 작은 것을 잃어버렸다. 큰 것만 찾는다. 작은 회사는 이력서도 안 내고 대기업만 기웃거린다. 청년들은 취업이 안 된다고 아우성이다. 차라리 놀지언정 작은 월급은 곁눈질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낯 모르는 사람을 무작정 많은 월급을 줄 회사가 어디 있는가. 우리 속담에 ‘첫 술에 배부르랴’라는 말이 있다. 차근차근 일을 배우고, 정직과 끈기로 나아갈 때 회사로부터, 윗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진급하고, 점차 대우를 받게 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순리이다. 처음부터 단번에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단번에 합격을 원한다. 그런데 수고 없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닐뿐더러 소망 있는 곳도 아니다. 감사는 어려울 때, 고달플 때, 힘들고 지칠 때 올릴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36:1)

 

셋째, 감사는 지금(현재)을 찾는 운동이다. 현대인은 ‘삶의 자리’를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먼데서 성공을 찾는다. 성공은 먼데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here and now). 지금부터 두드리고 찾아내고, 어려운 지금, 책을 읽고 연구하고, 안 되는 지금에 집중하고 깊이 파고 들어가면 길이 보인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현재),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고 있는가? 세상 모두가 불공평, 불공정, 불의한 것이 아니다. 세상이나 돈이나 물건이란 녀석은 중성적이다. 거기엔 인격이 없기 때문이다.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생각하고 만들어가는 대로 되는 게 세상이다. 감사하며 나아가면 세상도 감사의 세상이 된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라 안경의 색깔대로 보일뿐이다.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 가운데 세상을 볼라치면 온통 불평 거리만이 보일뿐이다.

 

구한말의 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타인보다 조금 늦은 나이인 25세에 미국을 유학했다. 그는 미국에서 푸대접받는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앞마당 쓸기 운동, 정직운동을 펼쳤다. 그의 작은 몸짓과 리더십에 의해 한인들의 위상을 한없이 높여놓았다. 감사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감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작지’란 나로부터, 작은 것부터, 지금부터 감사의 실천을 시작하자는 의미이다. 그래서 감사운동은 은근과 끈기가 언제나 필요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서양의 속담이 있듯이, 나로부터 감사를 시작해나갈 때 언젠가는 땅과 하늘이 소통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1980-90년대 가톨릭(김수환 추기경에 의해)에서 시작한 중요한 캠페인이 있었는데 ‘내 탓이오’이다. 사회가 어렵고, 국가가 어렵고, 민주화는 꼬여가고, 남북회담도 불발되고, ’ 86 아시안게임, ’ 88 올림픽은 잘 치렀지만 사람들의 인성과 내면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상태, 사는 게 모두 모두 어려울 때 고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 제창된 “내 탓이오 운동”은 ‘회개의 운동’의 일환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회적 파급효과가 컸다. 한 사람, 리더십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개신교 측에서 자리다툼에 여기저기 분열현상을 보여줄 때, 사회와 국민들은 교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작년도 종교인 통계에서 개신교 신자가 제일 많다는 보고가 있다. 여기에 자화자찬할 때가 아니다. 개신교회는 이미 종교 호감도에서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일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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