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장 41- 44절을 중심으로

마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본문은 전통적으로 ‘헌금의 모범’에 관한 교훈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전통적 해석이 틀린 것이라 주장하는데, 그들에 주장에 따르면 해당 본문은 서기관을 비판하시는 말씀에 대한 하나의 예문(예증)일뿐이다(12:38-40). 그들은 40절 말씀에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라는 문장에 주목하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비판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과부의 헌금’을 언급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말에 따르면, 가난한 과부의 행위는 긍정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 미련하게 가산을 빼앗기는, 몹시 부정적이고 미련한 행위로 간주된다.

이러한 주장은 전통적 견해를 반박하기 즐겨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리고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주목 받는다. 기성 교회의 헌금 강요에 신물이 나다보니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게 여겨지고 좋아 보이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외부적인 상황들이 성경해석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기계적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깊은 기도 중에 성령의 조명하심을 기대하며, 겸손히 주의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1. 새로운 주장을 펼치는 자들은 전통적 견해를 반박하면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에게 날 선 비판을 가하시다가 갑자기 과부를 칭찬하시는 것이 문맥상 전혀 매끄럽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기관을 비판하시고 과부를 칭찬했다고 하셔서 문맥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을 잘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우선 “예수님이 보시는 것과 사람이 보는 것은 같지 않다”는 하나의 큰 주제가 흐르고 있다. 예수님은 전체 문맥을 통해 당시 유대인들의 그릇된 시각을 교정하여 주신다. 사람들은 서기관을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위선자에 불과했다. 또한 사람들은 많이 헌금하는 부자들을 존경하고 부러워하였으나 그들은 자신의 많은 재산 중에 일부를 헌금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실상은 과부가 더 많이 드린 것이었다.

2. 1의 주장은 뒤의 문맥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증명된다. 왜냐하면 성전에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마태에 의하면 그들은 제자들이었다). 예수님은 너희가 화려한 건물을 의지하고 자랑하느냐, 그것이 돌 위에 돌이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겉모습과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가난한 과부의 본문 안에서 보자면 사람들은 헌금의 액수에 주목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헌금하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주제가 동떨어지지 않도록 40절에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과부’가 두 본문을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전체 문맥으로 보자면 장면의 전환이 35절부터 시작되고(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13장 2절에서 마친다(성전에서 나가실 때) 이러한 장면 안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선망하고 있던 몇 가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시선과 유대인들의 시선이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지를 말해주고 계신다. 첫째는 혈통적 다윗의 나라이다(35-37).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신다. 둘째는 지식이 많은 서기관들이었다(38-40). 그들은 율법을 이해하고 잘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위선자였으며 과부들을 보호해야 할 율법의 의무를 저버리고 많이 기도하는 등의 종교적인 행위에 집착했다. 셋째는 많이 헌금하는 부자들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어렵다’ 말씀 하실 때 ‘그러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겠냐며’ 제자들이 의아해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많은 부자들보다 과부가 오히려 가장 많이 헌금했다 하시며 그녀가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넷째는 화려한 성전 건물이다(13:1-2).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조차도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 말씀하신다.

4. 그 밖에도 이 본문이 단순한 예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만한 이유는 허다하다. 우선 마가복음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마가의 복음은 비교적 짧고 간결한데 그 이유는 독자들의 긴박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마가는 고통당하는 헬라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금 ‘십자가의 제자도’를 상기시키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어 그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이 책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급속한 속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진행된다. 세례 요한의 등장도 간단히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교훈도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분량이 매우 적다. 예수님의 비유조차 한 장뿐이며(4장) 심지어 12장에 이어 등장하는 종말 강화도 한 장으로만 기록되었다(13장). 대신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고 있음이 거듭 역설되고 있다. 이를 위해 ‘즉시’란 단어가 총 40번 사용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지적하시고 굳이 그것을 증명하시려고 성전에 앉아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셨다는 사실까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본문이 만일 예증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면 긴 지면을 할애하여 서기관을 거세게 비판하는 마태의 복음에 등장해야 하는데, 오히려 누락되어 있다(마23:1-36).

5.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이 다른 부자들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면서 강조형의 구문을 사용하신다. “내가 진실로(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43)” 혹은 “내가 참으로(알레도스) 너희에게 이른다(눅21:3).”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과부가 다른 모든 이들보다 더욱 많이 헌금하였다는 사실을 진실로 강조하시며 주지하시고자 하셨다. 단순히 서기관들이 과부를 어떻게 착취하는가를 밝히려 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님은 헌금함에 대하여 앉으셨고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지 살펴보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고 말씀하셨다. 단순히 과부가 종교인들의 설레발에 속아 억지스런 헌금을 내고 있다고 해석하기에는 예수님께서 매우 신중히 행하셨고 여러 행동을 하셨다. 마가의 본문은 본래 디테일이 강하지만 단지 ‘예증’을 위한 것이라면 이와같이 사건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할 이유가 없다.

6.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에 헌금을 내는 행위나, 과부의 헌금에 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시는 말씀이 전혀 없다. 만약 그녀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려 했다면 다른 어떤 장치들이 더 존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가 넣은 돈은 당시 하루 품삯의 1/64 밖에 되지 않는 지극히 적은 금액이었다. 겨우 한 끼의 식사 정도를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예수님이 과부가 착취당하는 점을 강조하려 하셨다면 굳이 이토록 적은 액수에 초점을 맞추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녀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적게 넣었음을 분명히 강조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겉모습만(헌금의 액수)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혁파하려 하셨기에 반대로 그 과부를 크게 부각시키시고, 모든 사람들의 모범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7. 성전에 있던 헌금함은 ‘여인의 뜰’에 놓여 있던 열세 개의 나팔 모양 헌금함이다. 이 헌금의 사용처는 각기 목록별로 지정이 되어 있었다. 요즘 헌금 봉투가 종류별로 있는 것과 유사하다. 여인이 13개의 헌금함 중에 어디에 돈을 넣었는지는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돈이 서기관의 호주머니로 흘러 들어갈 확률은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서기관들은 율법의 참된 정신을 따라 과부들을 보호해야만 했지만 오히려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의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헌금’보다는 ‘사회적’이었다. 서기관들은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각종 민사, 형사 재판의 재판관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착취했다면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이유, 오늘날로 치면 정치인들이 서민들을 착취하는 것과 유사한 형태였을 것이다. 설령 과부가 그들의 가르침에 속아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하더라도 서기관이 직접적 착취의 주체가 아님으로 그들을 비판하기 위한 예증으로 삼기에는 개연성이 떨어진다.

8. 마가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어떻게’(방법에 대한 의문사) 헌금을 하시는지 보려고 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초점은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하는지에 있었고 그 분은 서기관과 과부가 아니라 ‘부자와 과부’를 비교하고 계신다(41-42). 병행본문인 누가복음을 보면 이것이 보다 분명해 진다. 누가는 당시 상황을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눅21:1-2). 그러므로 이 본문은 헌금에 대한 교훈으로 결론이 나야 문맥상 자연스럽다. 만일 전체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게 여겨진다 하더라도 본문이 명확하게 독립적인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면 일차적으로 그 의미에 집중해야 한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바가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단순히 서기관들을 고발하는 예문의 기능으로 전락시켜 버린다면 우리는 주님께 커다란 우를 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9. 전통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당연 어리석다 비난 받아야 하겠지만 전통은 겹겹이 쌓여온 역사의 산물이다. 그만큼 무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배격하려면 그에 합당한 무게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전통적 해석을 지지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데도 굳이 그것을 내어버리려 하는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과부의 헌금은 그 어떤 사람들의 헌금보다 지극히 큰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부자들의 헌금 액수에 주목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헌금은 그 헌금자의 마음과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10. 끝으로 한 가지를 덧붙여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주장은 타당하지 않지만 적실성이 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을 다 바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단지 사람들은 헌금의 액수에 주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헌금하는 자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 하셨다.

신복교회 최갑진 목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