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떠난 감사여행 (12) -임승훈 박사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필자가 속한 교단의 사회선교단의 2차선교대회가 지난 6월25일 공릉동의 나눔아트센터 에서 있었다. 이때 초빙강사가 차준희 박사였다. 그는 예언자의 영성을 미가의 예를 들어 설명해나갔는데, 그의 강좌가운데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말이 있었다.

강의초반 도입부의 한국선교초기의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감사와 감격의 이야기였기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나의 감사글에 초반을 장식한다.

 

차준희박사는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초창기 기독교의 힘과 정직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첫째 이야기는 1895년 10월8일 새벽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총독부의 고위층이 보낸 자객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보고를 받고 황급히 달려온 고종은 선혈을 흘리며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은 왕비를 부여잡고는 “거기 어디 예수 믿는 사람 없는가?”, “거기 어디 예수 믿는 사람 없는가?” 외쳤다고 한다. 1884년 9월20일 의사알렌이 부산항에 입항한지 11년, 아펜셀러와 언더우드가 인천항을 통해 조선땅에 복음을 전한지 꼭 10년이 되는 해였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입에서 촌각을 다투는 억울한 일이 벌어졌던 그 순간에 기독교인을 불렀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고종과 궁중에 끼친 강한 인사이트와 신뢰감을 상징한다.

두 번째는 〈대한그리스도인회보〉(1899년 3월1일자)에 기록된 기사 이야기다. 당시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이 횡횡하던 조선말엽이었고 국기는 문란하였다. 조선이란 나라를 놓고 벌이는 세계열강들의 욕심은 노골화되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때였다. 한 관리가 북도군수(평안도) 자리를 샀는데 웃돈을 줄 테니 영남도로 바꿔달라는 탄원을 냈다는 웃지 못 할 기사였다. 이유를 알고 보니 당시의 평안도는 초창기 기독교인들이 조선 땅에서 많은 곳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부흥의 터전이었다. 당시 북도 주민들이 모두 강직하고 청렴하여 부정이나 뇌물이 통하지 않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많은 돈을 들여 산 관직이었기에 이 관리는 2~3년 안에 매관매직에 들인 돈을 회수를 해야 하는데 통하기는 글렀다는 이야기다. 이유는 단 하나, 그곳의 기독교인들 때문이었다. 19세기 말에 들어온 초기의 조선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청렴했는지, 부정이나 부패에 얼마나 단호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 번째는 일본 수사관들의 대화문서이다. 1919년 3월1일, 3,1만세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파죽지세로 전국으로 번저 나가는 만세소리가 예상되는 만큼 초장에 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할 계획을 한터.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구금과 체포령을 내렸다. 체포, 고문, 수사 등 강압통치의 과정에서 수사경찰들은 이 사건을 속히 마무리하길 원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참으로 간단하였다. ‘폭동의 주동자들을 신속히 잡아들여!’ ‘예수를 믿는 지만 물어라!’ 수사관들의 대화문서 기록이다. 어떻게 모의했는지?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과정은 무엇인지? 등을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그리스도인인가?’를 물으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하급간부가 ‘아니 그들이 예수를 안 믿는다면 어찌합니까?’ 되물으니, 상관은 ‘조선 야소교인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기독교인은 1%가 채 안되었다. 그런데 3.1만세운동으로 수감된 사람들 중 40%가 예수쟁이들이었다. 일제하 기독교인들은 당시 최고의 지식이었으며, 정직하였으며 의에 대하여 독립에 대하여 굽힐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민족과 나라를 구출하길 원하던 앞서가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위 세 가지 사례에서 볼 때 참으로 놀랍다. 와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놀라운 이야기 아닌가. 지금 필자는 개그를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말 급변하던 국난의 때, 대한제국의 황후가 일본인 낭인 자객에 의해 조선의 수도 궁궐 한복판에서 목 베임을 당하던 부끄러운 때, 그리고 고종황제가 서거하여 나라와 민족의 등불이 사라지던 때 기독교인들은 분노하였고 일어섰고 존중받고 신뢰받던 존재였다. 그것이 한국의 야소교였고 기독교의 모습이었다.

대한민국에 이렇게 영광스럽고 놀라운 예수 복음이 들어온 것을 감사한다. 복음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린다. 또 놀라운 사건들을 소개해 준 차준희 박사에게도 감사함을 드린다.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해방 후 10년을 주기로 배가에 배가를 거듭, 파죽지세로 부흥하였다. 해방 당시 기독교인 수는 4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거치고 50년대 중반 80만여 명으로, 60년대엔 다시 150만여 명으로, 70년대엔 300만여 명으로, 80년대엔 600만여 명으로, 90년대엔 1200만여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참으로 기독교 부흥의 원동력이요 발전의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성장에 대한 열정에 기인한 점도 사실이다. 초창기의 목회자들은 정말 가족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이 몸이 부서져도 복음이 살고 교회가 산다면...’이란 자세로 헌신하였다.

선교사들의 헌신에 기인한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서울 합정동의 선교사묘역에 가면 한 분 한 분의 스토리에 숙연해지며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단연코 19~20세기를 빛낸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평신도 기독교인들의 전도와 기도, 부흥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 해도 그것도 또한 어느 정도 사실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앞에서 차준희 박사가 언급한 서두의 이야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초기 한국의 기독교는 정직성의 징표였다. 정의의 사람들이었다. 부정을 몰랐다. 영성 하면 기독인들이었다. 불교나 무당이나 어떤 타종교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이 기독교인들에게 있었다는 말이다. 기독교가 그랬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다. 이것이 신뢰가 되고 바탕이 되어 한국교회사에 밑둥을 바쳤으며 저변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 생명수였다. 이글을 쓰는 필자는 감동이 북받친다. 감격이다. 감복하는 감사 이야기다. 대한민국에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목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복음을 외친 것을 감사한다. 하나님 아버지 영광을 받으소서.

한국교회 초기 매서 전도인의 모습. 훗날 대부흥의 중요한 씨앗이 된다.

감사운동은 겨자씨의 비유처럼 처음에는 매우 초라하고 클 것 같지 않고 나무도 인간도 될 것 같지 않던 존재가 크게 자라나 자기 구실을 한다는 이야기운동이다. 하나님의 원리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 겨자씨가 자라나더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놀랍도록 큰 나무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청소년 시절 15살 때였다. 부친이 병드시고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공부하던 형제들이 모두 휴학을 하였다. 장가든 큰 형님이 농사를 짓는다고 시골로 내려가면서 작은 누님과 나도 휴학으로 일 년 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농사는 모내기철이 가장 바쁘다. 못자리에서 어린 벼를 이앙하여 모내기를 하는데 거기서 볍씨가 달리고 쌀이 나오는 원리를 그 때 눈으로 보고 체험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 엉성하던 모종이 두툼하고 우직한 볏단 뭉치가 되어간다. 서 너 개 옮겨 심은 벼 모종이 열두세 포기 이상으로 곁가지를 늘려 자라난다. 그 한 포기에서는 한 이삭마다 낱알이 70~100여개씩 달린다. 성경은 30배 60배 100배의 원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볍씨의 경우만 살펴보면 약 200배가 결실하고 있음을 본다. 보통 4개의 볍씨 이앙에서 12개포기로 번식하고 거기에서 벼이삭마다 80여개씩 달리니 그렇다는 말이다. 상상할 수 없는 원리인 것이다.

30일 동안 1에서 시작한 금전을 배가해 늘린다면 30일째가 되는 날 1억 원을 훌쩍 넘긴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선생님으로부터 들은 그 같은 산술적 배수 원리의 놀라운 이야기는 수에 약한 나를 경악케 했다. 산술적 배수도 그러하거든 성경이 이야기하는 겨자씨 비유의 이야기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인간이 생각한 그 어떤 것보다도 놀랍도록 질적으로 크고 부흥하고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의 겨자씨와 그 나무도 새들이 깃들이도록 은혜를 베풀고 혜택을 나누며 함께 누린다는 이야기는 내게 복음으로 다가온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 4:20; 마 13:8; 눅 8:8)

시작은 상당히 작아 보이지만 감사가 나의 심령과 우리가정에 들어올 땐 도저히 생각지 못한 놀라운 힘이 되고 파급력이 되었다. 우리 가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내와 함께 감사의 원리에 대해 알아버린 후 그것은 소망이 되고 믿음이 되었다. 그 때는 이미 아내가 먼저 예수전도단의 BeDTS훈련을 받았고, 나 또한 BeDTS훈련을 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영적인 문제가 생길 때는 언제든지 같이 기도하고 같이 결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감사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제거해 나가기로 작정하였다. 특히 재정에 투명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내와 의논하고 결정을 내렸다. 카드와 빚을 청산하기로 작정하였다. 자녀교육비로 인한 은행부채와 카드빚을 정산해보니 1억여 원에 달했다. 부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피눈물 나는 원금을 갚기 시작하였다. 2017년 8월 현재 부채는 3천 만원대로 떨어져 있고, 나의 학자금을 비롯한 자녀들의 학자금을 모두 청산했다. 한 달에 최소 50만원에서 100만원 이상씩 원금을 상환하였다. 대중교통만을 고집하였고, 외식을 금하였으며, 소비는 철저히 줄일 수밖에 없었다. 카드는 모두 소각하였다. 교통카드를 겸하고 있는 1개만 단체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다. 재정에 자신감이 붙으니 감사에도 속도가 붙었다. 감사의 내용들이 더욱 더 풍성해지고 있다. 재정에 쫓기면 감사에 실패하기 쉽다. 은혜의 생활이나 믿음의 생활에도 결국은 실패한다.

노년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시대, 자녀들이 나를 요양원에 보낼까 고심하는 시대, 생명은 연장되나 노후는 두려움이다. 침대에 누워서 뒤척이며 사는 생활에 무슨 행복이 있을까. 필자는 70 은퇴 이후가 더 바쁜 생활인이길 원한다. 건강을 챙기고 퇴직 후 달려갈 새로운 노년을 기약한다. 독서로 다져진 두뇌와 마음, 속사람의 역량, 운동으로 챙긴 하체와 근육의 힘, 기도와 감사로 강건해진 속사람의 영성이 나의 70대 이후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감사운동을 시작하게 하신 그분께 진정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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