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1:1~3

김현석목사, 유일교회담임,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총동문회장, 서울신대와 동대학원 졸업, 리버티신학대학교 D.Min.

서울신학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개강예배(2017년 9월 4일, 백주년 기념관 512호)를 교수와 대학원 총동문회 임원과 100여명의 학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는 뜻깊은 출발을 선포하는 특별한 예배였다.

특히 개강예배 설교자로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총동문회 회장 김현석목사(유일교회)를 초청하여 은혜로운 말씀을 함께 나누었다. 김현석목사는 요나서의 깊은 신학적 문화적 언어적 시대적 사명적 통찰을 하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말씀을 전했는데, 일반적인 설교 형태가 아니라 철저히 본문을 연구하고, 모든 설교 내용을 예배드리는 청중들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읽어가는 방식을 취했다. 설교가 학문적 깊은 고찰의 장이며 듣는 모든 학생들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예배였다.

또한 김현석목사는 학우들이 학업에 전념하기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유일교회의 정성을 모아 교회 장학금을 전달하였다. 또한 대학원 총동문회에서는 9월 28일 500만원의 장학금을 학교에 전달을 한다. 선배가 후배들을 격려하는  가장 좋은 본보기이요 선물은 무엇일까? 바로 장학금 일것이다. 장학금은 학생들에 큰 힘이요 위로가 되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할것이다.

장학금전달: 김현석 회장

또한 개강예배때, 주승민교수가 신학전문대학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주승민교수는 대학원 원장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받았으니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할것을 다짐하였고, 함께 성장하며 배우며 사명을 따라 요나처럼 쓰임받는 학우들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주승민목사,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신전원 원장

총동문회에서는 대학원생들에게 최서형박사의 『치료혁명』책을 선물로 제공했다. 최서형 박사는 위담한방병원 병원장으로서 27년간 통합의학에 사명를 걸고 연구하여, 새로운 의학의 길을 열었다. 4차 산업혁명이 오늘 우리 시대의 화두이다. 그 화두의 정점에 의학계의 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으며,  4차 의료혁명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통합의학은 서양의학과 동양의학과 대체의학을 융합하여 새로운 환자 중심의 치료 방식을 연구한것이다. 

 

요나서를 통해서 사명을 열어가는 김현석 목사의 설교 메세지

▣열기

요나서는 12 소예언서에 속하지만 그 출발부터 모든 예언서와 성격이 다르고 구조도 다르다. 요나서는 예언자의 말이나 신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언자 요나에 대한 이야기”를 3인칭 시점으로 기록한 책이다. 즉 기록자가 요나를 추적하여 그의 행적을 기록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요나서는 저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예언의 내용보다 종교적 교훈을 주는데 요나서의 특징이 있다.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와 달리 신학적 의미가 크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신빙성에 대해서는 실존 인물로 보고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믿지만,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 통치 때 갈릴리 가드헤벨 출신이다. 가드헤벨은 스불론 땅에 있다(수 19:13). 그리고 열왕기에 나오는 요나(왕하 24:25)와 요나서에 나오는 예언자 요나를 동일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요나서의 신학적 배경은 요나라는 동일 인물의 이름으로 독선에 빠진 유다주의자들에게 경고하고 국수주의자들을 배격하기 위한 교훈서로 보는 것이 좋고, 유다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다른 책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통치세계를 전 세계로 확장하는데 공헌하였다.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 이방인도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요나서이다.

요나서 내용을 볼 때 포로후기의 산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3장 7절 등에 나오는 조서(칙령, 타암) 등 용어가 포로후기에 나오는 아람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선교사역시 요나서를 인용하였고(마 12:38-41, 눅11:29-32), 예수님 역시 복음을 유다 땅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류전체를 향할 구원의 계획으로 확대하였다. 요나는 히브리인으로 선민의식이 강한 자였으며 편견에 사로잡힌 예언자였다. 하나님의 자비는 전 세계로 미치고 있었으나 요나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강대국들은 심판받아야 마땅하며 선민인 히브리인만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나서는 세계를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편협한 유다주의자 요나의 생각, 하나님의 방법과 요나의 방법이 다름을 교훈하고 있다. 세계만방을 심판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정당성과 주권행사, 선민의식으로 우쭐대며 제 사명을 잃어버린 요나의 어리석은 생각, 여기서 하나님과 요나와의 질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을 대표한 선지자 요나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지에 합치되지 않을 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차질 없이 진행하신다. 요나는 이것을 알아야 했다.

여기서 요나를 편협한 이스라엘로 본다면 요나가 도망가기 위해서 승선한 배는 전 세계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큰 도성 니느웨가 비록 적의 도성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도 선한 사람이 있으며 회개하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놀라운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고임’(이방인)에게도 회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시며 생명에 이르게 하신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요나는 과거의 적대감정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니느웨의 멸망을 바라고 있다. 그래서 그는 불신앙의 고기 뱃속까지 내려가게 되며 거기서 구출 받는다. 구약성서의 복음서에 속하는 요나서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은혜를 주고 있는가?

풀기

 ◐사명을 받았으나 도망가는 어리석은 요나는 우리의 옛 모습이다.


예언자 요나는 아미타이의 아들이다.(욘 1:1) 요나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 속에도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그는 이름과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였다.

아버지 이름은 ‘아미타이’이다. 즉 ‘진실한, 충성스런'이란 뜻이 있다. 요나 역시 예언자로는 특이한 이름이다. 요나는 '비둘기' 란 뜻을 지니고 있다. 대체로 순결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충성스런 자의 아들-비둘기”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그런데도 요나의 행동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여호와의 말씀(다바르)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였다. 성실한 자의 아들에게 주의 말씀이 내린 것이다. “너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는 분부가 떨어졌다. 그러자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서 일어났다. 요나보다 늦게 등장한 이스라엘의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고 ’에브라임(이스라엘의 애칭)은 어리석은 비둘기같다‘(호 7:11)고 하였다.

요나를 이스라엘로 확대할 때 그는 분명히 어리석은 이스라엘이다. “니느웨의 죄악이 내 얼굴 앞으로 올라오고 있으니 그리로 가서 외치라”(1:2)고 하셨다. “내 얼굴 앞으로 악이 올라온다” 하나님의 견딜 수 없는 심정의 고백이다. 국가가 범하는 죄, 인류가 짓는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밀히 기억하신다. 그들이 행한 범죄가 하나님 얼굴 앞으로 올라간다. 히브리어 원전이 ’레파나이‘이다. “내 얼굴 앞에”이다. 요나서 기자는 ‘얼굴 앞에’를 자주 사용한다. ‘내 얼굴 앞에서 도망가려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떠나 배 밑창으로 내려갔다‘(1:3).

요나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피하여 욥바로 내려갔으며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피하여 배 밑창 뒤편 조용한 골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호와의 얼굴 앞에 있었다. 인간은 누구도 여호와 얼굴 앞에서 도망갈 수 없다. 민족주의자 골빈 요나는 이것을 알아야 했다.

구약시대 제의 종교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활동 영역을 축소시켰다. 더 나가서 구약성서의 역사는 땅(에레쯔)의 역사이다. 땅의 약속, 복귀와 입주, 관리와 축복으로 이어진다. 요나는 바다가 있는 욥바로 내려갔으며 다시스로 떠나는 배를 탔다. 하나님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바다로 나간 것이다. 요나서 기자는 배에 대해서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욥바 항구에서 발견된 배는 “아니야”이다. 통상적인 배를 의미한다. 그런데 요나가 선가를 지불하고 배 밑으로 내려갈 때 5절 하반절에서 배는 “쎄피나”이다. ’덮개가 있는 배‘라는 뜻이다. 도망자 요나에게 있어서 숨어 가기에 아주 좋은 배였다.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에레쯔 이스라엘'에게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바다까지 찾아오셨으며 그 배가 있는 곳에 폭풍을 던져 큰 파도를 치게 했다. 배는 파선 직전에 있었다. 4절을 I.C.C.는 이렇게 번역하였다. ‘It(the ship) thought it would be broken’ ‘그 배는 부서지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요나가 사명을 버리고 도주하자 무생물인 배가 파선될 것을 생각했다. 무생물인 배가 사고하는 기능을 갖게 되었다

 

◐ 풍랑 만난 배와 사공들은 온갖 종교가 있는 세계의 축소판이다.

여기서 사공(선원)들이 나온다(욘 1:5). 사공(뱃사람)으로 에스겔 27:8, 29절에 나온다. 사공(선원)들은 예기치 않은 폭풍을 만나자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있는 짐들을 모두 바다에 던졌다. ‘던졌다’가 세 번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은 요나가 탄 배 위에 ‘큰 바람’(루아흐 께돌라)을 던지셨고, 사공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모든 짐을 던졌으나 파도가 멈추지 않자 요나를 들어 그 바다에 던졌다. 그러자 바다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공들은 풍랑이 심하고 파도가 거세지자 두려움에 떨었으며 ‘각자 자기 신들에게 부르짖었다’(1:5).

히브리인들은 직업으로서 사공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의가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빌었다. 그러나 이방신들은 참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신만이 참신이다. 요나는 이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요나는 고백했다. ‘나는 히브리인이오, 육지와 바다를 만드신 하늘의 하나님의 여호와를 나는 두려워하오(1:9),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오’. 요나는 죽음을 자초하면서도 니느웨 행을 거부하였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바다는 잠잠해졌다. 여기서 사공들은 세계의 축소판이다. 선원들의 종교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열방의 헛된 종교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비교이다. 요나는 선원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던졌으면서도 대승적으로 니느웨의 큰 민족의 구원을 보지 못하였다. 요나는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다. 그는 그 정도로 니느웨가 싫었던 것이다. 요나의 고향은 북쪽 지방 갈릴리이다. 앗수르는 항상 갈릴리 지방을 우선적으로 침략하였다. 요나의 고향 갈릴리 지방은 BC 732년경 앗수르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때부터 ‘이방의 갈릴리'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갈릴리 사람들의 희망은 앗수르가 망하는 것이다. 요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지 않았던 것이다.

 

◐ 큰 성읍 니느웨는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지이다.

요나서는 동사(마나)가 3번 나온다. ‘마나’는 ‘정하다. 명하다. 예비하다’(appointed)이다. 요나가 바다에 떨어지자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고(마나) ‘삼키라’고 명령하셨다(2:1), 4장 6절에 한 번, 8절에 한 번, 모두 세 번 나온다. 요나가 있는 막사를 낮에는 시원하게 밤에는 온화하게 감싸주기 위해서 박넝쿨을 ‘예비하시고’(마나) 자라게 하신다. 그래도 요나가 깨닫지 못하자 아침 해가 뜰 무렵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시고(마나) 요나의 머리를 햇볕으로 강하게 타격하시며 때리신다(나카).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살아났으며 결국 니느웨 도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니느웨로 들어갔다(자기 의사가 아니다. 3:3), 그는 그곳에서 하룻길을 다니면서 딱 한마디의 메시지만 전하였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진다” 그 것 뿐이다. 이것이 예언자가 전한 신탁의 전부이다.

그리고 요나는 40일 후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대표한 예언자요 니느웨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약소국의 적들이었다

요나는 니느웨의 멸망만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했다.

니느웨는 오래된 도시였으나 앗수르의 수도가 된 것은 B.C. 705년경 이후부터이다. B.C. 612년 바빌론에게 망할 때까지 악한 도시로 이름을 남겼다. 예언자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은 마땅히 받아야할 징벌이라고 예언하였다. 이런 악한 도시에 하나님은 선교사로 요나를 파송하신 것이다.

히브리어 원전은 3:3절을 “그런데 니느웨는 하나님에게 있어 큰 성읍이었다”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도시의 규모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큰 성읍 이며 꼭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처럼 니느웨도 하나님께 속한 큰 성읍이었다. 그런데도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진다”고 선포했으며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0일이면 회개하는데 넉넉한 시간이며 구원받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참으로 니느웨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요나가 선포한 말이 살아 움직였다. 그 말이 니느웨의 왕에게까지 닿았다. 심판선언의 신탁이 왕에게 알려지자 즉각 반응이 일어났다.

왕은 보좌에서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였다. 조서(타암)를 내려 단식을 선포하였다. 왕을 위시해서 대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먹지도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하였다. 그 영향이 동물(가축 떼)에게까지 파급되었다. “사람이나 가축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것도 맛보지 말며 목초도 뜯지 말게 하며 물도 마시지 말아라(3:7). 굵은 베옷을 입고 사람이나 가축 할 것 없이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어라(3:8)” 니느웨는 힘이 있다고 손바닥으로 행한 악행을 뉘우쳐야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회개가 한 번도 없었다. 악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니느웨에서 희귀한 광경이 벌어졌다. 역시 니느웨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영적으로 큰 성읍이었다.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 남 북왕조가 모두 멸망할 때도 이런 회개를 하지 않았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도 이제부터라도 철저한 회개를 해야 한다.

이제 이스라엘은 편협하고 배타적인 선민사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 선민에게만 준 것이 아니다. 함께 사는 이방민족에게도 복을 주셨다. 이스라엘만 위한 하나님으로 국한시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요나서는 히브리인에게 하나의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이제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세계 열방의 하나님도 되신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민족은 그가 비록 적대국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구원을 받는다. 골빈 요나는 제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투정부리거나 하나님께 항변해서는 안 된다. 인류는 함께 공존해야 하며 함께 구원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심판보다 구원 베푸시기를 더 원하신다.

요나는 세계를 위한 선교사가 된 것을 감사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도 세계 만민이 선민과 함께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요나의 판단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시며 그를 달래시고 타이르신다. 하나님의 질문을 끝으로 요나서가 끝나고, 요나는 철저히 달라진 선지가 된 것을 암시한다.


▣닫기

하나님의 세계 만민을 위한 구원의 의지를 어떻게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요나서는 곧 구약성서의 복음서이기도 하다. 두고두고 새겨보아야 할 진리의 말씀이다. '큰 성읍 니느웨 안에 좌우도 구별할 줄 모르는(영아와 유아)12만여 명이요(니느웨 전체 인구는 60만명으로 추정) 가축도 많이 있는데 내가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겠느냐?"(4:11) “요나야 네 생각이 옳은지 내 판단이 옳은지 생각해 보아라” 말씀하신다.

 

▣Q.T와 적용

◐ 나는 하나님의 사명자이지만 처음의 요나처럼 속이 좁고 편협한 고집쟁이는 아닌지?

◐ 나는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주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끝까지 추구하고 있지는 아닌지?

◐ 나는 우주를 통치하시고, 내 인생과 목회와 가정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고 있습니까?

왼쪽, 최원영목사(본헤럴드발행인, 대학원총동문회 부회장), 지수근목사(대학원총동문회 수석부회장), 김현석목사(대학원총동문회 회장), 주승민교수(신전원 원장), 이상훈목사(원우회 회장), 최병희목사(신전원 원우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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