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떠난 감사여행 (19)-임승훈 박사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실패자로 등장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죄 짓는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왜 그들이 죄를 지었을까? 에덴은 모든 것이 풍족하고 보기에 좋고 아무런 죄를 지을만한 이유는 없다. 불완전한 모습이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완전했고, 모든 것이 온전하며, 모든 것이 완벽한 하나님의 동산이었다. 그야말로 에덴이라는 동산은 아담과 하와가 삶을 영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하나님이 설계한 낙원이며 거기는 첫 인류의 후손들도 계속해서 살아야 할 땅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에덴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다. 절대로, 모든 것이 넉넉했다. 먹을 것도, 잠 잘 곳도, 입고 사랑할 것도, 누리고 살아갈 것도, 그들이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조차도 부족함이 없었다. 풍성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걱정할 것도 없었다. 장래에 대한 근심, 자녀에 대한 걱정, 교육에 대한 염려, 저축할 재정에 대한 불안, 겨울나기에 대한 월동 걱정, 연탄 걱정, 땔감 걱정을 비롯하여 매연 걱정, 미세먼지 걱정, 자외선 걱정, 수온 상승과 온난화 걱정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을까? 왜?

하와가 뱀과의 대화 가운데 이런 말이 등장한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창3:2) 여기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3절)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가 왜곡해 버린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고 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것을 곡해(曲解)하였다. 누가 만지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선악과의 열매를 감상도 하지 말라 했는가. 모든 것을 허락했다. 하나님께 주신 누림의 자유였다. 첫 인류,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안에서의 자유는 그야말로 무한이었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도록 금하였던 것이다.

하와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해버린 것이다. 뱀으로 등장하는 사탄이 꼬였다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보다 충실했어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환경과 자연과 대지를 마음껏 누리며 ‘감사’하기만 하면 되었다. 헌데 아담과 하와는 그리하지 못하였다. 의심과 유혹의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했다.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곳간’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꼬인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 뱀은 하와의 의심의 언어를 타고 일거에 하와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온다. 아주 자연스럽게 무혈입성(無血入城)한 것이다. 타락의 결과는 처참했다. 하와의 마음과 그녀의 가정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멋쟁이 신랑 아담도 무참히 무너뜨렸다.

John Roddam Spencer Stanhope, The Expulsion from Eden, 1900

우리가 사탄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거절이다. ‘아니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사탄은 힘이 센 존재가 아니다. 힘 센 것처럼 보일뿐이다.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무섭고 징그럽게 보일뿐이다. 하지만 ‘노’라고 거절하면 사탄은 그 즉시 꼬리를 내리고 도망쳐버린다. 하와는 거절하지 못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가 그런 거절하지 못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을까? 죄의 뿌리(의심, 회의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사탄의 말대로,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진다 했는데, 우리 눈이 밝아지는 게 뭐 그리 중요할까. 우리의 시력으로 세상을 보고 누리고 여행하고 즐기고 행복을 누리는 데 아무런 걸림이 없다. 우리의 눈은 아무리 겉보기에 작아도 문제가 없다. 심지어 실눈을 떠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헌데 뱀의 말대로 얼마나 눈이 더 밝아져야 속이 시원했을까. 하와는 눈이 어두웠는가? 시력이 나빠 정말로 눈이 밝아지기를 원했던 걸까? 그런 것은 아니다. 뱀이 유혹의 눈빛으로 혀를 낼름거릴 때 그대로 용납(容納, 容認)해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러니 뱀이 들어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뱀은 앞을 막으면 스르르 비켜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허락하면 들어오는지도 모르게 들어와 똬리를 튼다. 하와가 그의 말을 허락했으므로 ‘눈이 밝아진다는 소리’에,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소리에, ‘선악을 알게 된다’는 소리에 그만 항복해버린 것이다.

아담은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는 동안 곁에 있으면서 보고만 있었다. 아담은 하와의 타락 사건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무능한 남자로만 보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존재이유를 물을 때에 무서워서 숨었다고 고백한다. 반쪽 고백이다. 내가 벗었기에 두려워졌다는 게 숨은 이유라는 것이다. 정직하지 못한 고백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느냐’ 물으신다. 아담의 고백은 핑계뿐이었다.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이 짝지어 준 여자, 그녀가 열매를 내게 주기에 먹었다고 대답을 한다. 며칠전 그녀에 대한 감탄은 없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은 온데간데없다. 감사에 실패한 것이다. 분명코 아담과 하와는 감사의 실패자였다.

필자는 더감사운동본부의 감사지기이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마음속에 세운 중요한 기관이요 최근 왕성하게 활동하는 단체이다. 더감사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감사운동은 시작되었다. 감사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니 성경이 다르게 보인다. 감사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182곳에 이르는데, 첫째 감사는 제사와 깊게 관련하여 나타난다(레위기). 둘째는 하나님이란 명칭과 밀접하게 관련하여 나타난다(역대상하). 셋째 감사는 여호와께 올릴 찬양과 함께 종종 드러나고 있다(시편). 이 세 가지 관점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잣대(규범, 규빗)이다. 제사 드리는 자의 자세가 바로 감사 관점이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감사 받기를 제일로 좋아하시는 분임을 알려준다. 또 다른 하나는 감사는 찬양과 함께 올려드릴 내용임을 알게 해 준다.

이 같은 새로운 관점으로 성경을 보건데,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조성하신 놀랍도록 신비하고 아름답고 수려한 곳임에 틀림없다. 의심과 유혹이 판을 치는 수치스러운 곳이 절대로 아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감탄할만한 거룩한 땅이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전적으로 그들이 감사하지 못한 결과였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감사하는 사람은 타락할 이유가 없다. 감사하는 사람은 죄에 빠질 이유가 없다. 감사하는 사람은 사탄과 벗할 이유가 없다. 감사하는 사람은 사탄의 꼬임을 무시해버릴 능력이 있다. 감사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사탄의 말을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다. 감사에 성공하는 사람은 사탄의 언어를 밟고 넘어선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찬양하고 칭송하는 사람이다. 감사에 성공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고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감사의 힘은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갈 능력과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은 감사의 사람이다. 그는 평소에도, 지혜를 구할 때도, 그리고 어려움이 예상되는 긴박한 때에도 언제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찾았다. 다니엘의 특징은 하나님께 길을 묻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것이다. 주님의 뜻은 무엇이며 나는 이때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질문하였다. 다니엘은 특별한 지혜자였지만 결코 자만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 간곡히 지혜를 구하였다.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범사에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정한 기도시간을 두고 있었다. 늘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는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감사의 사람이었다. 평안할 때에든지 위급할 때든지, 지혜가 필요할 때든지, 능력이 필요할 때에도 그는 늘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고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감사의 사람이었다.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였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게 감사하였다.

Daniel in the Lions' Den, Peter Paul Rubens, 1615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단 2:23)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다니엘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된다. 에덴동산은 다니엘이 살던 이방 땅의 모습과 비교할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감사에 전념하고 성공하던 다니엘의 모습과 그 인생의 결과를 생각하면 감사관점, 감사생활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만일 오프라 윈프리나 헬렌 켈러, 한국의 신영복 선생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볼 때, 세 분이 감사와 자기성찰에 실패했다면 오늘의 저들이 있었을까 생각하기 어렵다.

* 오프라 윈프리(1954~ )는 감사일기를 통하여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 16세 이전의 오프라와 이후의 생은 전혀 다르다. 감사가 없던 생활과 감사를 회복한 그녀의 생애, 감사가 그를 다르게 만든 이유이다.

* 헬렌 켈러(1880~1968)는 1990년 성년이 되고 하버드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움크리고 자존감 약한 여성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살기로 작정하고는 ‘감사생활’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담대하고도 당당한 감사생활은 그녀를 장애에서 벗어나게 했다. 역대 미국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녀의 어록은 너무나도 찬란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을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

* 신영복(1941~2015)은 억울한 일로 엮어져 박정희의 유신정권에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고는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20년20일이라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감옥에서 보냈다. 하지만 수감생활 중 불평이나 원망보다는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감사를 통해 어둠을 승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주었으며 어두웠던 한국현대사의 등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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