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4일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에베소서는 짧지만 성경 가운데 가장 깊고 풍성한 신학적 내용들이 담겨 있는 진리의 보고와도 같은 책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말씀들이 땅위의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천상의 가르침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1940년대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한 존 멕케이의 회심경험을 보면 이 서신이 마냥 그렇지만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멕케이는 불과 14살 때 에베소서를 읽고 회심하였습니다. 나중에 멕케이는 자신이 소년시절 에베소서를 읽고 회심한 일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어렸지만 에베소서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나는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체험,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중심이 되었다. 나는 소생한 것이다. 나는 정말 살아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함께 에베소서를 나눌 때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에베소서는 전체가 6장으로 구성된 편지인데 다른 바울서신서처럼 전반부인 1-3장까지는 교리적인 진술이고 후반부인 4-6장까지는 삶에 관한 교훈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패턴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먼저 에베소서의 서론적인 인사에 해당되는 1-2절, 그 중에서도 1절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절은 에베소서를 쓴 송신자인 바울과 수신자인 에베소교회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송신자가 바울이 아니고 수신자도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그 주위의 교회들도 함께 돌려서 볼 수 있게 한 회람서신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절은 편지를 적은 사람이 바울이고 편지를 받는 사람이 에베소 교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최초의 사본에 “에베소에 있는” 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이 편지가 에베소를 비롯한 주위의 교회들이 다 돌려서 읽은 회람서신이라고 해도 분명한 것은 보낸 사람이 바울이고 받는 교회가 에베소 교회인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송신자와 수신자를 밝히는 이 간단한 소개에 성도가 어떻게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인식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바울과 사울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왜곡된 것이 많아서 바울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잠깐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알듯이 사울은 회심하기 전의 큰 자라는 뜻의 이름이고 바울은 회심하고 나서 바꾼 작은 자라는 뜻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참 은혜롭기는 한데 사실은 아닙니다.

사울이라는 히브리말은 ‘구하다’, ‘요청하다’라는 뜻을 가진 ‘샤알’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구하여진’이라는 뜻입니다. ‘큰 자’란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나 회심하고 나서 곧 바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하고 나서도 계속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행13장의 구브로 선교에서 최초로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회심한지 13-14년이 지난 후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이 회심하고 나서 즉시 바꾼 작은 자라는 뜻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이라는 히브리식 이름만이 아니라 로마식 이름도 함께 가지고 있었는데 사울의 로마식 이름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라는 이름은 작은 자로 살기 위해 회심하자 말자 일부로 바꾼 이름이 아니고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로마식 이름으로 구브로 선교 때부터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죠? 큰 자였다가 작은 자를 추구한 것이 아니고 바울은 누구를 만나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쪽으로 자신의 이름과 생애를 사용하고 헌신했다는 의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나라를 위해 우리의 이름을 사용하고 생애를 헌신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자기를 소개할 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라고 소개한 의미입니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는 체념적 의미로 사용하든지 아니면 자기야망을 실현하는 수단이나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 시키는 용도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인데 할 수 없지 뭐, 하나님의 뜻인데 다른 소리 말고 따라오세요, 하나님의 뜻인데 다 넘어갑시다.” 그러나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되었다고 하는 말은 그런 체념적 의미나 자기야망의 수단이나 자기합리화의 변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학적 자기성찰입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 안에서 쓴 옥중 편지입니다. 왜 감옥에 가 있는가 하면 사도로 복음을 전하다가 갇혔습니다. 사도로 부름 받지 않았다면 감옥에 갇히지 않아도 될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는 감옥에 갇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사도로 부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환경과 처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바울이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인기와 영화를 누리는 길로 접어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참으로 대책 없는 길을 간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주를 만난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그리고 김세윤 박사 같은 분의 말에 의하면 아내가 있었는데 이혼을 당하고 유대사회에서 축출당합니다. 가는 곳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한 특공대가 따라다닐 정도로 증오의 대상이 됩니다.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바울에게 이런 의미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의 로마감옥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감옥 안에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냥 한두 번 기도로 물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광부가 금을 캐듯이 심마니가 산삼을 찾듯이 간절한 마음과 열망으로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말씀을 통해 묵상하며 나아가는 신학적 탐구입니다.


요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고 있어서 반가운 마음입니다. 심리학이 각광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인문학의 최고는 철학이죠.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람들은 철학자들의 말과 책들을 통해 인생을 탐구하고 인간을 추적하고 삶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어느 정도의 유익은 있습니다. 물질적 인간탐구와 심리적 인간탐구와 아예 그런 인간탐구의 마음조차 없이 쾌락적 삶을 살아가는 자들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신학적 인간탐구라는 바탕이 없는 철학적 인간탐구는 한계가 있죠. 그것으로 하늘의 세계와 구원의 진리는 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플라토닉 러브를 주창했던 소크라테스는 미남 청년 알키비아데스를 애인으로 두면서 소년을 향한 열정이 그 어떤 사랑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주장하면서 동성애의 철학적·도덕적 논리를 제공했지 않습니까? 성경적인 인간탐구의 바탕이 없는 인본적인 철학의 인간탐구는 결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해를 더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서울의 한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청년부를 지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연세대 철학과를 다니던 한 여학생이 성경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전도사님, 대학에 와서 철학을 전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예수님이 안 믿어져요....어떻게 해요?” 이 여학생은 장로님의 딸이었습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아보였던 이 여학생이 그런 고백을 할 줄은 아무도 예상을 못했습니다. 터져버린 그녀의 울음 때문에 더 이상 성경공부를 진행할 수가 없어서 모두가 그녀를 위해 기도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눈물이 잊혀 지지가 않습니다. 철학적 인간탐구의 한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만히 보면 현대인의 삶은 너무 공허한 것 같지 않습니까? 페이스 북에 이런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참 공감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교육에 투자하고 취직을 하면 회사에 입고 갈 옷과 출근할 차를 산다. 그리고 그 돈 다 갚으려고 뼈 빠지게 일한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은 하루 종일 비워놓을 집값으로 다 쏟아 붓는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누가 우리의 삶을 이렇게 허무하게 만들었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소개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인생의 근본적인 물음 앞에 신학적 자기탐구를 답으로 제시합니다. 에베소서는 그가 감옥 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면서 깨달은 진리들을 전해주는 편지입니다. 감옥 안에서 그는 자신을 사도로 부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회와 성도를 생각하고, 환경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 안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도 신령한 복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을 탐구하니 예정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놀라운 구원의 신비가 깨달아졌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를 불러 어떤 자리로 인도해 가시는지, 그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풍성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 되는 교회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인간을 바라보니 허물과 죄로 죽어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어버린 인간과 그런 인간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 구원의 은혜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 무엇이며 은혜로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이 어떻게 새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피차에 복종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야 할 믿음의 선한 싸움이며 영적전쟁이라는 진리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춥고 배고프고 고생스러운 감옥 안이 신령한 곳이 되었습니다. 노래를 그치게 하는 암울한 감옥 안이 찬송의 교실이 되었습니다. 끝없이 사람을 침체에 빠지게 하는 감옥 안이 구원의 위대한 진리와 교회의 영광을 가르치는 에베소서라는 위대한 신학교재가 탄생하는 산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를 인식하고 환경을 살피는 신학적 탐구의 놀라운 유익과 복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 중에 자신의 삶이 감옥 같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있는지요? 모든 노래가 끊어지고 신음과 절망밖에 뱉어낼 수 없는 암울함을 느끼고 계신 분은 없는지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과 환경과 여건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땅의 문제는 땅만 쳐다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볼 때 땅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늘이 열릴 때 땅이 풀립니다. 하늘을 보면서 땅을 사는 신학적 자기인식과 통찰이 성도의 승리의 비결과 찬송의 비결이라고 오늘 에베소서 첫 시간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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