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has not come yet!)

본푸른교회 예배당 앞 잔듸밭. 교회 성장은 메인 주 도로나 아파트, 사람 밀집 지역에서 교회는 성장한다. 그러나 본푸른교회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장소에 교회를 세웠다. 때로는 인간의 원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방법도 있음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다.

제가 섬기는 교회(본푸른교회)는 2000년 3월 9백에 60만원 월세로 지하실 30평에서 시작하여 만 17년이 되었다. 세월의 흐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갔다. 당시 교회의 어린이들은 단지 우리 아이들 2명과 집나님 자녀 한명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교회 마당에는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생이 되고, 중고등학교와 초등학교와 유치원들을 다니고 있다.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니 주님께서 교회와 지체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어렵고 힘든 세월을 믿음으로 이길 수 있도록 도우셨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본 것보다 더 큰 은혜로 도우셨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앞으로 이어갈 교회의 미래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has not come yet!)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주님이 써 가실 미래가 더 궁금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문득했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분명히 살아남는 기업도 있고, 죽어가는 기업도 생긴다. 우리 사회에 강소기업, 강소교회라는 말이 보편화되었다. 강소라는 것은 작지만 강한 기업을 말할 때, 다시말하면 경쟁력있는 세계적인 기업을 말한다.

그러면, 내가 섬기는 교회는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세상에 주님의 이름을 세워갈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까?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강점을 되집어보았다.

첫째로, 영적인 분야이다.

영적으로 허약하면 다른 모든 것이 완벽하더라도 쓰나미처럼 곧 무너지게 된다. 주님이 17년동안 영적으로 강하게 준비시켰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로 만드셨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능력있는 사람을 보고 의지한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를 드리며 주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온유함의 대가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경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졌다. 모세를 향해 끊임없이 원망과 절망의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이끌고 40년간 광야를 돌았다. 모세는 40년간 인내의 삶을 살았다.

모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리더로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통해 훈련의 시간은 아주 고되었다. 매섭고 차가운 밤바람과 혹독한 더위속에서 내려놓음의 지혜와 인내를 배웠기 때문다.

큰 산을 올라가본 사람은 작은 산은 산처럼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미래사회는 영적 대혼란이 찾아온다. 세상의 조류로부터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고, 신앙의 유산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강해야 한다. 17년간 하나님이 강한 군사로 훈련시켰다. 주님의 배려요 사랑이요 축복이다. 이것이 가장 큰 복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둘째로 정서적인 면이다.

교회는 코이노니아이다.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따스함을 연결하는 본질이다. 교회는 정서적으로 메마르지 않고 풍성한 사랑의 교류를 함께 나눈 공동체로 성숙되어왔다.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면 행복하다. 감사의 분위기가 있다. 서로 이해와 배려의 공동체가 된다. 이것이 특징이다.

목사와 성도간에 믿음의 이야기 꺼리가 있는 공동체이다. 따뜻하고 정감이 묻어 있는 교회. 연약한 자와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들에게는 힘이 되어 주는 교회가 되었다. 없는 자를 보살피며, 위로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였다. 많은 분들이 정성을 다해 협력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기억에 남는 자매가 있다. 박00집사님은 개척 멤버이다. 자매는 유치원 교사로서 많은 월급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매년 보너스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힘들고 어려운 분들에게 전액을 무기명 헌금으로 기탁하여 나눔을 실천하였다. 믿음의 실천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자산이다. 주님께서 함께 어우러지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주셨다. 이것이 힘이다. 작지만 강한 교회의 모습이다.

셋째, 경제적으로 많은 훈련을 받았다.

늘 어렵고 힘들었지만 주님의 은혜로 풍부에도 궁핍에도 적응하는 비결을 배웠다. 주님을 위해서 무조건 내려놓는 것을 배웠다. 17년간 목회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인내와 내려놓음이다. 경제적으로 늘 마이너스 삶이지만, 주님 계시기에 마음은 늘 부자처럼 살았다. 내려놓음의 기쁨을 경험하는 귀한 시간들이었기에 아름다운 마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내려놓음이 없이는 주님의 나라는 세워지지 않는다. 사명의 길은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이 없는 사역은 바리새인의 길을 걷기가 쉽다. 내려놓음이 없는 사명의 길은 나무의 잎사귀는 아름다운데 열매가 없는 나무로 남게 된다. 내려놓음이 없는 사명의 길은 역사의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과 기억을 남기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물질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을 하셨다. 주님과 물질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사명의 길은 아주 간단하다. 자기 주머니부터 열어야한다. 남의 지갑을 먼저 열려고 하지 말라. 나의 지갑을 다 여는 것이 사명의 길이다. 오늘날 착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남의 지갑으로만 사역을 하고 싶어한다. 이런분들에게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는다.

넷째, 관계적으로 지독한 훈련을 받았다.

주님의 사랑을 베푼 만큼 돌아와야 하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도 경험했다. 노력한 만큼, 애쓴 만큼 성장하고 수고의 대가를 받아야하는데 어떤 때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아픈 마음을 하나님 앞에 말하곤 했다. 하나님 목회가 쉽지 않네요. 주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며 헌신의 삶을 살았는데 결과가 너무도 형편없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도 경험했다. 그러면서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다섯째, 장소적으로 훈련시켰다.

교회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장소이다. 교회가 마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가가 없는 한적한 곳에 뚝 떨어져 있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다. 17년간 교회를 스스로 들어와서 성도가 된 분은 한분도 없다. 이것도 기적인 것 같다. 30대에 개척을 했는데 벌써 50대 중반이 되었다. 비전도 많고 생각도 많고 열정도 많은데 생각만큼 추수는 적었다. 마음속으로는 서서히 두려움이 찾아오고 이렇게 목회가 끝나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몰려 올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장소를 뛰어넘는 분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마음의 위로와 믿음으로 견디는 시간이었다.

17년간 인내의 시간이었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시간이었고, 더 큰 미래를 향한 그림을 그리는 믿음의 시간이었다.

강한 훈련을 받은 군사는 실전에서 살아남게 된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교회의 미래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놀랍고 위대한 부흥을 이제부터 부어 주실 것이다. 나는 믿는다. 부흥은 과거완료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좋았던 지난날만 추억하며 사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가올 미래의 아름다운 부흥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부흥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목회를 하다가 교회 성장의 한계로 인해 어찌할바를 몰라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또한 삶에 지친 분들도 계실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에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분명히 더 좋은 미래가 준비되어 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복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분들 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요함의 축복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영적으로 더 깊어지기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가?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나는 힘들고 막막할 때마다 늘 외친다. 나를 위해 준비한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은 이제 시작이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담임, 본헤럴드 모바일 및 인터넷 신문 발행인,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새길과 새일 (사)부이사장, 본월드미션(재)이사, 글로벌비전(사) 이사.  본국제신학교 학장, 저서: 주기도문연구,  제자 세우기 40일 영적순례, 충성된 일꾼되어가기 등

◐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분명한 이유는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이는 단 1분도 살 수 없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희망이 없어서 오늘도 죽어있는 사람처럼 의미 없이 사는 분들이 있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에게 바울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일평생 믿음의 표본으로 보고 따라가야 할 신앙의 대선배이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민족의 조상으로 열방의 조상으로 세웠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말을 빼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4:2,3).

희망이란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율법적으로 죄인이 의인되는 것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의로운 사람으로 주님이 인정하신다. 나는 의롭지 않은데 주님은 나를 의롭다고 하신다. 의로운 사람은 희망과 기쁨과 감사를 가슴에 품고 산다. 죄인들은 절망과 원한과 증오를 가슴에 품고 산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의인의 자손이 되는 권세를 누릴것이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열방을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했다. 열방의 제사장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훈련이다. 아브라함이 소유한 믿음은 우리들에게 표본이된다.

◐아브라함의 믿음: 희망이 없을 때도 바라보고 믿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4:18). 표준새번역을 보면 18절 말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진정한 믿음은 희망이 없을 때 믿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 1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정한 아들을 주시지 않았다. 아내 사라도 생물학적 나이로 보면 여자가 아이를 날수가 없다. 생물학적으로 자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지만,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을 외치는 사람이다.

엘리야 시대에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3년 6개월 동안 가뭄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보고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절망속에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손바닥 만한 구름 한 조각을 보고 곧 큰비가 올것이라고 말했다. 백성들은 비가 올 가능성이 없다고, 희망이 없다고 외쳤다. 그러나 엘리야는 곧 큰비가 올 것 이라고 선포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만에 마리아의 집을 심방했다.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면서 말한다. 주님이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오빠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했다.

주님을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무덤가에 가서 돌무덤을 옮기니 벌써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와 많은 유대인들에게 말했다.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11:41). 큰 소리로 나사로를 향하여 외쳤다.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살아서 무덤에서 나왔다. 믿음이란 희망이 전혀없을 때에도 희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 약속을 의심하지 않음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이 견고하였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4:20). 표준새번역은 본문의 내용을 더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끝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믿음: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함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4:21,22). 믿음이란 이루어 주실 줄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과 희망은 같은 뿌리이다. 믿음있는 사람은 희망을 품고 살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산다.

사람들이 왜 인생을 포기하는가? 희망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헬렌켈러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녀가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란 글을 보면,

‘만약 내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첫째날에는 나를 가르쳐주신 설리반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뵙고 싶습니다. 둘째날에는 새벽 일찍 일어나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들을 보겠습니다.

셋째날에는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낮에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오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지막으로 사흘동안 눈을 뜨게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 힘들어서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분들 계신가? 우리들은 최소한 헬렌켈러보다 더 좋은 조건의 소유자들이다. 믿음이란 희망을 품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희망의 불을 피워야 한다.

◐불멸의 이순신: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속에서 기억에 남는 멘트가 있다. 모함으로 직위를 박탈당한 이순신은 평범한 군인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담하게 패하고 목숨까지 잃은 이후의 장면에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이순신을 찾아온 평생지기 영의정 유성룡은 전쟁터에 다시 나가지 말라고 권고한다. ‘자네를 버린 나라요 임금이네. 다시는 전쟁터에 나서지 말게 내 목숨을 걸고 전하에게 말할 것 일세’ 그러나 이순신의 대답은 바로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말로 대신 자신이 뜻을 전한다. 이순신에게 남은 배는 12척이었다. 12척으로 수백척의 왜선과 싸워야하는 위기에서 이순신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백성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아직도 백성들은 조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원망하지만 그 언저리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단 12척의 배로 이순신은 세계 해전사에서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었다. 전란의 위기에서 민족을 구한 사람들은 만신창이가 된 이순신과 보잘것없던 12척의 배와 백성들이었다. 이순신이 버리지 않은 희망의 불씨가 횃불이 되어 민족을 구한 것이다. 아직도 조선을 기대하며 그 언저리에 머물고 있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심어주었다. 이순신은 12척의 배를 보며 혼자말로 읖조렸을지 모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오늘 한국 교회는 영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또한 우리들도 영적위기를 느끼고 있다. 미래는 엄청난 변화를 강요 받을 것이다.

12척의 배가 수백척의 배를 물리쳤던 것처럼, 12명의 목숨을 건 사명자들이 일어나야 한다. 예수님은 거룩한 하늘나라 비전을 12명과 함께 나누었다. 12명이 세계 복음화의 횃불을 들었다.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거룩한 희망의 불씨를 피워야 한다.

절망적인 분위기를 누가 희망적인 분위기로 바뀌겠는가? 누가 안된다고 말할 때 된다고 희망의 말을 하겠는가? 율법으로 정죄할 때 누가 복음으로 감싸않겠는가? 꺼져가는 복음의 불씨를 누가 부흥의 불길로 바꾸겠는가? 희망이 없는 절망의 가정을 누가 세울것인가?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가 절망가운데서 희망을 가지는 이유가 있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현재의 고난 때문에 기죽지 마라. 우리의 미래의 축복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을 예비하고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고 하였다.

하나님은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절망과 낙심과 상처로 얼룩졌어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어도, 시베리아 북풍에서 불어오는 시린 찬바람같이 너무 외롭고 고독할지라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 것이다. 우리를 빚은 주님은 우리를 향한 비전을 품고 계신다. 나를 향한 비전이 있기에 오늘 우리들은 다시 희망이란 글씨를 가슴에 품고 일어난다. 더 크고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너무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이다.

기도원 정문
성도들과 함께 기도원 마당 정리
예배 기능이 무너진 20년의 세월속에 황폐화된 기도원, 20년만에 새롭게 기도의 성산으로 탈바뀜하고 있다. 희망이란 기도의 불씨을 꺼뜨리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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