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진 목사

① 마태와 누가의 예수님의 족보 차이

마태와 누가의 족보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견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태의 족보는 요셉의 계보를, 누가의 족보는 마리아의 계보를 따랐다고 보는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 둘 다 조상이 다윗이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견해는 요셉의 ‘법적인 족보’와 ‘혈통적 족보’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다. 일정한 시기가 지난 후 양자로 입적되는 등(법적인 계보)의 일이 발생하여 두 계보가 차이가 생겨났다고 본다. 그러나 두 복음서 사이의 족보의 상이점은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 가운데 하나이다.

② 나사렛 사람

마태는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돌아온 뒤에 ‘나사렛’에 거하신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분이 '나사렛 사람'이라 칭해질 것이 예언되었다고 말한다(2:23). 그러나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구약성경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마태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명칭을 ‘멸시받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유대사회의 관용구인 셈이다. 이것은 마태가 유대공동체를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한 해석이다. 나다나엘 역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하면서 그 지역 출신을 멸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요1:46). 그렇다면 마태의 예언은 시편 22편 6절(나는 벌레요,백성의 조롱거리)이나 혹은 이사야 49장 7절(사람에게 멸시 당하는 자) 말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③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는가?

세례는 본래 이방인들이 새롭게 유대교에 입문할 때 받는 것이었지만, 요한의 세례는 주로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졌다. 유대인들은 새롭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믿음의 고백으로써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처럼 세례는 새롭게 되는 것의 표지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그것은 그 분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새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가 요한의 요청이 아니라 예수님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대를 이루시길 원하셨다. 그 분은 자기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백성들과 연합을 이루신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적용받은 새 사람들 역시 그분과의 연합의 표지로서 세례 받는 측면이 있다(마3:13-17).

④ 예수님의 광야시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자가 예수님의 삶의 모범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예수님에 관한 특정한 사건을 그대로 모범으로 삼는 것에는 주의가 따른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시험장면을 묵상하면서 장기간의 금식이나 세상과 단절되어 주기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적용은 사람들을 이원론적인 오류로 이끌기 쉽다. 예수님의 행적에는 계시적인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왜 광야로 가셨는가? 시험을 받기 위해서이다. 시험이란 일종의 검증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명기에 나타난 말씀(6장,8장)으로 모든 시험을 물리치시는데, 옛 사람 아담과 광야의 이스라엘은 실패하였지만, 새로운 아담이자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능히 이기셨다. 그분은 진정한 메시아이시다. 마태는 천사들이 나와 수종을 들었다고 서술하는데,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권위를 나타내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4:1-11). 그렇게 보면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것도 이리와 사자들과 어린 아이들이 함께 있는 메시아의 나라를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본문은 우리에게 금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메시아로 믿고 섬기길 요구한다.

⑤ 예수님의 팔복은 조건문인가? 서술문인가?

일반적으로 팔복의 가르침을 조건문장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는 말씀을 ‘만약 마음이 가난하다면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번역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하려면, “이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는 구조로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왜 그들이 복이 있는가? 근거를 밝히고 계신다. 따라서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특성을 서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써 복을 받은 자들이며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애통하지만 위로를 받기 때문에 행복한 자들이다(5:1-12).

⑥ 예수님의 산상수훈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모든 내용을 한 시, 한 장소에서 말씀하시진 않았겠지만, 마태는 의도적으로 그 모든 내용을 하나의 주제로 엮어 편집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과 ‘삶의 양식’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먼저 천국백성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들은 여덟 가지 이유에서 복 있는 자들이며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다. 그들은 선한 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세상과 구별되어, 진리와 복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5:1-16). 아울러 그들은 옛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로운 법’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빛 안에서 새롭게 드러난 온전한 ‘하나님의 법’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다.

천국의 백성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탁월하게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5:17~20)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당시에 대표적으로 오용된 여섯 가지 율법항목의 바른 해석을 제시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닮아 온전히 사랑하게 하는 것이었다(5:17-48). 이어서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을 멀리하라 경고 하신다. 그들의 삶과 반대되는 천국백성의 삶의 중요한 원리는 ‘은밀함’이다. 그의 백성들은 숨기는 특성이 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아 주신다.

이어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알려 주셨는데, 오늘 날의 주기도문이다(6:1-13). 주기도문도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할지를 알려 주기 때문에 신자의 삶의 방향과 실천의 표지를 제시한다. 그 외에도 예수님은 ‘형제를 용서하고, 비판하지 말며, 땅의 것으로 인하여 염려하지 말고, 오직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찾으며, 간구하며, 재물을 탐하지 말고, 널리 구제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율’로 요약된다(6:1-7:12).

예수님은 긴 강화를 마무리 하시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과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할 것’을 말씀 하신다. 특별히 선지자들을 그 열매를 통해 검증할 것을 요청하시는데, 지도자들에 대한 분별의 필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의 사역자들에 대한 평가가 능력의 측면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순종의 측면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7:13-29).

⑦ 백부장의 믿음은‘기적’에 관한 것이었는가?

복음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특정한 사람을 칭찬하실 때는 그 사람을 모범으로 삼을 수 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기 때문에 백부장의 믿음을 부각 시키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주의할 지점이 있다. 그것은 그가 어떤 믿음을 지녔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믿음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 종교에 어디에도 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루신다"고 믿었다. 이 말은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의미이다. 말씀으로 모든 권세를 부리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신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미워하였으나,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은 예수님을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었고, 실제로 그 믿음을 삶에서 나타낸 것이다. 그의 믿음이 하나님의 아들을 경험케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지만, 그것을 믿지 못한 본 자손들은 쫓겨 날 것이라 경고하셨다. 아마도 마태는 유대인들이 백부장의 믿음을 듣고, 선한 시기심을 일으켜 더욱 올바른 믿음으로 나아오길 기대하였을 것이다(마8:5-13).

⑧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우리는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가?

본문을 보면 일반적인 시선과는 달리 마태는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그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례 요한은 단순히 회개를 요청했지만, 예수님은 실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신적 권세를 지니신 하나님이시며, 구원자이시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 곧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9:1-8). 마가와 누가의 복음서에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이 좀 더 부각되고 있지만 그들의 믿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었다.

⑨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인가?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침노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헬라어의 ‘중간태’로 쓰였는데, 문맥에 따라 단어의 기능이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천국이 ‘침략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또 다른 이들은 ‘수동태’로 이해하여 ‘천국이 악한 이들에게 폭력을 당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과 연결하여 이해한다면, 후자의 해석이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참수하였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11:2-19).

⑩ 예수님 안식일 그리고 주일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날 때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일이 발단이 되어 논쟁’이 발생했다(12:1-21).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그들의 정체성과 직결된 몹시 중차대한 문제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사장만 먹을 수 있었던 진설병을 다윗이 먹었던 것을 예로 드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인애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아울러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시고 사실은 그분만이 참된 안식의 제공자이시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사람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실현해야 한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안식일에는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의에 더욱 부합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신다.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주일성수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대치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일’을 구약의 안식일처럼 지키려는 우를 범한다. 주일에는 노동을 할 수 없고, 예배에 반드시 참석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안식일에도 사실상 선행을 더욱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라 율법적인 주일성수가 아닌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주일을 보내야 하는데, 주일에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높이며 그 분 안에서 참 된 안식을 누리되 선한 행위들을 적극적으로 나타내야 한다.

⑪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에게 주신 것인가?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이후에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 말씀하시고,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천주교회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보며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천국의 열쇠를 지녔다고 믿는다.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할 때 ‘베드로’라는 이름이 ‘반석’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를 반석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정통에서는 반석을 ‘베드로의 믿음의 고백’으로 본다. 베드로에게 주신 원래 이름은 ‘게바’인데, 이것을 번역하면서 베드로는 남성명사를 사용하였고, 이후의 반석은 여성 명사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은 대화의 문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고백 때문이었다. 결국 반석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참 된 고백이다. 주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이다(16:13-20). 그러나 뒤에 나오는 반석이 여성명사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반석을 베드로로 보지 않는 것은 근거가 빈약하다는 주장도 있다. 만일 베드로를 반석으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교회의 기둥’이라는 의미이상은 아닐 것이다(갈2:9).

⑫ 변화산에서 베드로의 반응은 모범이 되는가?

사람들은 베드로의 고백을 인용하여 깊은 산중에 초막을 짓고 살아도 예수님만 계시면 그곳이 천국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장막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장막이 아니었다(마17:4).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를 예배하기 위한 예배처소로 이해함이 옳다. 베드로는 아마 하늘의 영광의 빛에 압도되어 그들을 숭상하려 했던 것 같다. 마가복음 9장 6절에 보면 베드로가 두려워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증언한다. 그가 두려움에 떨려서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베드로의 발언은 제자들이 그 영광에 압도되어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긍정적인 믿음의 고백으로 볼 수 없다.

⑬ 손과 발을 찍어내라는 예수님의 과격한 말씀은 어떻게 이해할까?

마태복음에는 ‘지체 중의 하나를 잘라내서라도 온 몸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 두 번 등장한다. 처음 문맥은 간음과 이혼에 관한 가르침의 문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윤리가 얼마나 엄중하게 지켜져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일종의 ‘과장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5:27-30). 다음은 ‘어린 아이를 실족시키지 말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는데 전체 문맥은 교회의 권징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전체 교회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18:8-9). 교회를 몸으로 볼 때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들은 몸을 병들게 하는 지체중 하나이다. 그런 자들을 차라리 잘라내어 전체 교회를 보존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후 문맥은 교회의 권징의 엄중성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⑭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초보 신자를 두고 한 말씀인가?

가끔 교회 안에서 ‘초보신자’들이 열심히 봉사하면 이 말씀을 적용하여 치켜세우곤 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오히려 사람들이 우쭐해 하지 않도록 하신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 내에서 두 번 반복되고 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동일한 구절을 반복 배치함으로써 이 구절에 이어 등장하는 ‘품꾼의 비유’를 앞 문맥과 연결되게 하였다.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질문하였는데, 마태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특권의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먼저 된 자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욱 틀별하고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태는 다른 시간을 일하고도 동일하게 임금을 받아간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를 통해 먼저 되었어도 나중 될 수 있고, 나중 된 자들도 먼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높아진 마음을 책망하고 있음으로 이 말씀으로 누군가를 치켜세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20:1-16).

⑮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은 누구인가?

성경에는 ‘마리아’라는 여인이 총 다섯 명 등장한다. 1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2 막달라 마리아 3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 4.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5.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이다. 그 중에서 향유를 부은 여인은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이다. 이 기사는 요한의 묘사가 가장 디테일 한데(요12장) 예수님은 그분의 죽으심의 의미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녀의 행위를 기념하라 하셨다. 그런데 누가복음 7장에 본문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비슷한 사건이 두 번 있었다고 추측 해 볼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아마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여인은 간음이나 음행하는(창기) 죄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께서 정결법을 어기면서 부정한 여인과 같이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눅7:36-50).

※ 제가 만든 신약개론 교재 중 일부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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