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1. 욥(Job)기는 시가서(詩歌書)의 첫째 문서이고, 타낙(TaNaKh)-성문서(聖文書, 케투빔/writings-Ketubim)의 셋째 문서이다.

성경이 편집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창세기도 조그마한 문서에서 후기에 문장들이 추가되면서 포로기 후에 현 체계로 편집되었다는 주장이다. 그 조그만 문장을 모세가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수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실정이다. 욥기는 모세오경보다 더 저자나 저술연대 추정이 어렵다. 어떤 연구자는 욥기에 있는 단어가 아람어적 경향이 있기 때문에 포로기 후에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세기 구약성경이 70인경(헬라어), 탈굼(아람어)였다는 것을 잘 인지하지 않은 것 같다. 맛소라 사본(Masoretic Text, MT)은 1세기 말엽에 편집된 후기 문서이니, 맛소라 히브리어는 더 현대적인 언로 보아야 한다. 맛소라 사본의 욥기 문체로 욥기의 성격을 가늠하려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첫째, 욥기는 소설로 볼 수 없다. 정경에 소설을 포함한 종교는 없다. 편집된 문서들이 난무한 제종교의 정경에 소설이라고 제언하지 않는다. 편집이 증명되거나 밝혀지지 않는 정경 문서를 소설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욥기 외에 성경에서 욥을 믿음의 인물로 제시한다(겔 14:13-20, 약 5:11). 허구 인물은 믿음 사례가 될 수 없다. 욥은 한 시대, 한 지역(우스, 욥 1:1)에 생존했던 실재 인물이다.

둘째, 욥의 수명(약 200세)로 보아 족장 시대(아브라함)로 추정하고 있다. 욥기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112회 사용하는데 “엘 54회, 엘로아흐 41회, 엘로힘 17회”이고, 여호와라는 명칭은 32회를 사용한다. 다른 구약성경 본문에서 17회 밖에 나타나지 않는 ‘전능자’(솻다이)라는 명칭이 31회 사용된다. 하나님 명칭 사용에서 욥기가 족장 시대의 사건이고 그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김효성).

셋째, 욥기의 저자는 욥 자신이거나, 미지의 저자이다.

2. 욥기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해설서가 아니다.

인생이 겪는 고난과 하나님의 통치의 관계를 해소할 수 없다. 신정론은 신학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계몽철학(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1670년)에서 구체화된 미로(迷路)이다. 기독교 신학은 악(惡)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악은 실체가 아니다, malum igitur non est aliqua essentia in rebus, 아퀴나스). 욥기는 신정론의 한 텍스트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를 계시하는 정경이다. 고난은 탐구 내용이 아니고, 신뢰와 인내의 훈련장이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계시에 의존해서 탐구하고, 인간을 사랑으로 탐구하고, 창조 세계를 경이로 탐구한다.

욥기에 등장하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등장한다. 사탄이 고난의 근원이 아닌 것은 욥의 고백에서 잘 나타난다(욥 1장). 고난의 근원은 어디인가? 욥기에서 답을 하지 않지만, 폭풍우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욥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38-41장). 구체적인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않는다(내러티브의 특징). 욥이 회개하고 회복되어 끝날 뿐이다(욥 42장). 욥은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고 고백하고, 회개(욥 42:6)하고 끝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욥을 회복시켜 주신다.

신정론 질문은 “왜 사람이 고난을 받는가?”라는 난제이다. 이 질문은 “사람이 왜 고난을 받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질문하면 문제점이 드러난다. 실상, 사람이 고난 받은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고난 받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고통 의식이 없는 사람은 정신 병원에 있어야 한다. 현대인은 고통 의식을 제거하기 위해서 몸부림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은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고, 아예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Psychopath, 반사회적 성격장애)도 있다. 의인이기 때문에 고난에서 면제를 주장하지 않는다. 고난을 피하려고 복채(卜債)를 내지도 않는다. 의인은 자기 십자가를 질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난에 공감하고 동참하고 공존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고난은 죄의 삯이지만, 다른 면은 인간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낼 수 있다. 대한민국 사람은 1597년 명랑에서 이순신 장군이 12척으로 왜선(倭船) 133척을 격파하는 모습에 감동할 것이다. 풍요와 탐욕에서 전쟁이 발생했고, 전쟁의 파괴와 고난을 연합으로 극복했다.
 

3. 욥기는 42장으로 구성하고 있다.

1) 욥의 고난(1-2장), 우스 땅, 10남매, 최고거부, 사탄의 질문 “까닭 없이?”, 욥의 재산과 10자녀가 모두 잃고, 욕창까지 걸려 아내도 저주하고 떠나버렸다. 세 친구들이 욥을 방문했다.

2) 욥의 저주에서 세 친구들과 변론을 진행함(3-31장). 세 친구의 이야기 분량과 욥의 이야기 분량을 보면, 욥이 더 많은 변론(20장과 9장)을 전개했다. 세 친구들의 공통 주장은 사탄과 동일하게 까닭 없이 망함과 징계가 없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다. 하나님께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회개하고 이전 상태를 회복을 촉구했다. 사탄은 “까닭 없이 욥이 충성하겠느냐?”이고, 세 친구들은 “까닭 없이 망하겠느냐?”이다. 욥은 세 친구들에게 장황한 변론을 전개했다. 그런데 욥의 변론으로 욥의 세 친구들은 답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돌이키지는 않았다.

3) 욥과 세 친구의 담화(談話)를 보고 있던 엘리후의 주장에는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33-37장). 욥도 엘리후의 주장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못했다. 엘리후의 주장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고(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며, 고난도 연단이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엘리후의 주장에 대해서 어떤 반응이 없다. 매우 엄격한 신지식도 바른 서술에 멈춘 것이다.

4) 여호와의 말씀(38-41장). 여호와께서 폭풍우 속에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는 창조의 신비에 대해서 당대 최고의 지혜자인 욥에게 질문했다. 베헤못과 리워야단(Behemoth, Leviathan)을 움직이시는 전능한 여호와의 세계를 본 욥의 반응은 회개였다.

5) 욥이 눈으로 여호와를 본 뒤에 행한 것은 회개이다(42장). 여호와께서 세 친구와 욥을 화해시켰다. 10자녀를 주었고, 손자들까지 볼 수 있도록 생존을 허락하셨다.

4. 욥의 신학 난재와 생활 난제

1) 욥기에는 천상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대화 장면이 등장한 것이다. 서철원 박사는 하나님과 사탄과의 천상담론은 십자가 이후로 사라졌다고 제시한다(계 12:10). 어린양의 피의 능력은 참소하는 자를 천상에서 추방하고, 지상에서 전멸시킨다.

2) 인간적으로 열 명의 자녀를 낳도록 함께 한 부인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의 판단과 욕망의 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세 친구(엘리바스, 소발, 빌닷)는 욥에게 눌려 살았기 때문에 고통 중에 있는 욥을 공격했다. 욥은 세 친구를 통제하지 않았지만, 세 친구들은 스스로 억눌림과 수치심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혼자 앓은 병은 치료약이 없다. 엘리후의 너무 예리하고 정확한 언변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바꾸거나 치료하지 못했다. 사람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신비인데, 공감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정원 심리전단이 대국민 심리전을 전개한 매뉴얼은 반복 체계로 의심, 공포 그리고 증오 기재를 사용했다. 사람의 두뇌는 반복으로 주입된 가치를 체득하고 진리로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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