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20)

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중종(中宗), 주초위왕(走肖爲王), 39세의 나이로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서 생을 마감하다.

조광조(靜庵 趙光祖) 사상의 근원은 김굉필 → 김종직 → 포은 정몽주(鄭夢周ㆍ1337~1392), 야은 길재(吉再ㆍ1353~1419)까지 추적할 수 있다. 패색이 짙은 고려를 유학의 나라로 회복하려고 했던 포은과 야은, 군주와 사대부로 재편하려고 했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1342-1398)의 각축이었다. 사대부의 꿈은 강력한 태종 이방원에 의해서 좌절되었고(무인정사/왕자의난, 1398년), 수양대군에 의해서 군주 체계로 정착되었다(계유정란/계유정변, 1453년). 그리고 왕가에서 추태가 발생했고 정변으로 왕을 축출했다(중종반정, 1506년). 연산군은 희대의 인간으로 평가하는데, 폐왕(廢王)에 대한 평가 기준을 배려해야 한다.

연산군 이래로 조선 왕조에는 사화(士禍, 무오, 갑자, 기묘, 을사)가 발생했다. 사화(士禍)로 붕당이 자리 잡았고, 서인ㆍ노론으로 정치가 평정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사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림이 거대 담론 형성을 완료했기 때문이고, 그 기초가 정암 조광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암 조광조 이후로 조선 사회는 학문과 정치가 일치되는 학제일치 사회를 형성했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 제정일치 사회인 고려에서는 종교인이 타락했고, 학제일치 사회에서는 학자들이 타락한다. 종교ㆍ학문ㆍ정치가 별개 사안인 것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조선 시대의 강력한 이데올로기 사고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로 전환시켜 사회를 통치하고 있다.

정암 조광조의 위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국사 시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소격서(昭格署) 폐지’였다. 학문 천재 제왕인 세종이 보위에 있을 때에, 학문 업적은 『세종의 서재』라는 책에 잘 서술했다. 그 중 하나가 천문학도 조선 땅에 맞게 정착시켰다. 2016년에 방영했던 장영실에서는 세종이 가진 천문학에 대한 열정을 볼 수 있었다. 그 중심이 소격서였다. 그런데 조광조는 그 기관을 폐지했다. 도교와 하늘점을 치는 폐단과 유학숭상주의를 근거한 것이다. 유학은 기복(祈福)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점(占)을 거부할 것이다. 역사를 볼 때 재미있는 현상 평행선인데, 1517년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천문학을 근거해서 항해술과 새로운 지구 이해를 형성했고, 조선은 천문학을 폐지하고 있었다.

5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아테네의 학당을 모두 폐지했다. 철학이 이교적이고 우상적이기 때문이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분석은 옳지만 행동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한다. 12세기 기독교 사회인 유럽에서 대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에타 린네만은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에서 기독교 사상을 세우기 위한 성경 본문 이해를 근거한 대학과 학문을 제시했다.

종교는 이데올로기(ideology, 이념)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의식의 총합이고, 그 총합을 유지하기 위해서 총합의 힘을 발휘한다. 기독교는 이데올로기 해체를 추구한다. 인류 사회는 이데올로기가 해체되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조해야 안심하고 산다. 기독교가 중세 천년동안 자기가 만든 이데올로기에서 안주했는데, 그 이데올로기는 무시되고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있다. 개혁된 교회는 오직 믿음과 오직 성경으로 철저하게 배격하고, 복음의 자유를 그리스도인에게 제시했다.

이 글은 유학에서 ‘도봉서원’을 복원하려고 발굴을 진행하는데, 고려시대 ‘영국사(寧國寺)’라는 유물이 계속 발굴되어 난항(難航)을 겪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보면서 쓰는 기사 후기이다. “조선시대 서원터에서 왜 고려시대 절집 보물들이 줄줄이 나오나?”(한겨레, 2017년 10월 28일,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16434.html). 영국사 터 위에 왜 도봉서원이 건축되었을까? 그것도 조광조, 송시열이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고, 중건되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진 기구한 내력의 유적이라고 보도한다. 왕조실록에 거명될 정도로 유명한 사찰이 왜 갑자기 사라졌고, 그 위에 도봉서원이 축조되었을까? 흥선대원군은 왜 서원철폐령에서 그렇게 위세있는 서원을 철폐시켰을까? 호남에는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필암서원은 서원철폐에서 유지된 서원이 있다. 우리나라가 문화가 융성해지면서 옛날 무속이 발굴되고 있다. 그리고 서원들도 복원되고 있다.

문화는 생산 유발 기능이 아닌, 생산 기초이다. 문화 자체는 의미가 없고, 가공해야 생산 유발 효과가 발생한다. 문화가 융성해야 인간다운 의식이 풍성해 진다. 그러나 문화가 과도하면 인간은 교만해지고, 스스로 문화 형성을 억제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배가 고프면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면 되지만, 의식이 왜곡되면 아무리 새로운 질서가 와도 고쳐지지 않는다. 이 의식은 제도나 건물을 파괴해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학문 교육으로만 가능하다.

칼빈은 바른 신학 전수를 위해서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문화를 억압, 제거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건하는 방식은 무도한 것이다. 문화는 천천히 변화며 정착하는 것인데, 그 의식을 건강하게 세우려는 것이 학자의 경륜이다. 그런데 필자는 조광조가 정치 제도 혁파를 통해서 의식을 주도하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공했고 조선 중기와 후기를 주도했고, 지금도 우리 사회는 조광조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광조 뿐만 아니라 유스티아누스도 그런 과오가 있다고 생각했다.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는 지금은 칼빈이 의도한 것으로 운영되지 않을 것이다. 순수 학문 연구 기관이 필요하고, 이 땅에 적합한 사고 체계를 정착시켜야 한다.

고려 왕조는 마감했고, 조선 왕조도 마감했고, 지금은 대한민국 시대이다. 한 사람의 유능한 왕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국민의 의식을 훈련시키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왕은 자신이 왕인 것을 인지해야 왕이고, 왕은 자기가 타인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할지는 명료하게 아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왕은 악한 인간이다. 조광조는 유학숭상주의자로 한 체계를 확립했지만, 그 가치가 현재 나에게 어떠한 영향이 있는지는 각자가 평가해야 한다. 조광주의 위패가 있는 도봉서원 밑에 영국사라는 고려 사적이 있다는 보도는 유학숭상으로 불교를 압박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융성으로 타 종교를 제거한다는 발상도 좋지 않다.

구약의 ‘헤렘’은 직접 계시 시대였고, 최후통첩의 성격(인내의 정점)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은 복음이 드러난 계시완료시대이고, 창조 명령인 충만을 지향한다. 왜곡, 거짓, 억압이 없는 충만이다. 복음은 목표를 위해 수단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모두가 충만하고 융성할 수 있는 그러한 세상이 가능할까? 인류는 그것을 추구하고, 만유의 주는 선(善), 의(義)가 충만하시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