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3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해리 아이언 사이드라는 목사님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한 유명한 무신론자요 불가지론자가 자신의 명함에 쪽지를 적어 주면서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다음 주일 오후4시 아카데미 과학관에서 불가지론과 기독교의 대결이라는 제목으로 공개 토론을 제안함 비용은 내가 다 지불하겠음” 아이언 사이드 목사는 그 제안을 큰 소리로 회중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 도전에 매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토론을 하기 전에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서로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증인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당신은 불가지론과 무신론을 믿고 성경과 기독교를 무시하는 어떤 사람이 구제불능의 삶에서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과 사창가 같은 데서 정욕의 노예가 되어 부패한 삶을 살다가 결국 모든 걸 탕진하고 파산하고 파멸된 여자, 그러나 어느 날 선생이 주장하는 불가지론과 무신론에 대한 강연을 듣고 “아, 하나님은 없는 거구나”를 깨닫고 그 지저분한 삶 속에서 나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여자, 이렇게 두 명의 증인을 데리고 오시오.

만일 당신이 이런 사람 두 사람을 데리고 오실 수 있다면 나는 다음 주에 죄에 빠져 시궁창 같은 삶을 살다가 당신이 비웃고 있는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구원받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성도 100사람들 나의 증인들로 세우겠소. 그랬더니 어느 한 소녀가 외쳤습니다. ‘선생님, 저도 갈게요.’ 옆에 있는 한 구세군 사역자는 우리 구세군에서도 40명 보내겠다고 하고 여기저기서 그렇게 변화된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그 신사는 손사래를 치며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삶의 지각변동을 불러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복음이 일으키는 놀라운 삶의 변화는 언제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발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지난주까지 보았던 엡 1장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들에게 허락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노래하는 사도의 찬송과 그 은혜가 교회 가운데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져서 교회의 영광을 알게 해달라는 사도의 기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2장도 또한 이라는 헬라어 카이로 시작해서 1장에 이어 계속 구원의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오늘 본문인 1-3절은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강조하기 위해 구원받기 전 인간의 상태를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인간의 상태와 본질은 지금까지 어떤 철학자와 과학자도 밝히지 못한 너무나도 명쾌하고 분명한 인간에 대한 진술입니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고대철학은 인간에게 관심을 갖기보다 우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주의 기원이 무엇인가? 물, 불, 원소, 아르케........ 사람들은 높고 높은 우주에 관심을 두고 그 우주의 기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우주에 관심을 두는데 정작 사람들의 삶은 방탕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 소크라테스가 등불을 밝혀들고 아테네 시가를 돌아다니면서 실종된 인간의 양심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했죠. 우주 좋아하지 말고 너 자신부터 알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사는 21세기는 가히 인간론의 시대라 할 만큼 인간에 대해 연구가 활발하고 많은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많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은 크게 3명의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론에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첫째,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의 인간론입니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고상하고 문제가 없는데 육체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고 육체를 정죄하고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자유와 구원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인간론은 사람들을 금욕적인 신비주의로 이끌거나 방탕하게 만들었습니다. 플라톤주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 하면 초대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탄생,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면서 교회를 미혹했던 영지주의 이단이 바로 이런 플라톤주의가 사상적 배경이 될 정도였습니다.

둘째로 영향을 미친 인간론은 임마누엘 칸트의 인간론입니다. 칸트는 인간을 대단히 낙관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 선험적인 지식이 있는 것처럼 도덕률이 있는데 사람은 이 도덕률만 잘 개발하고 교육하면 얼마든지 선한존재가 되고 좋은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죠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내 가슴에는 도덕률이 반짝인다.” 이런 칸트의 인간론은 19C까지 세계의 지성을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향으로 형무소가 교도소로 바뀌고 사회보장제도가 개발되고 교육기관이 확대되는 등, 긍정적 영향을 많이 끼쳤습니다. 그러나 2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칸트의 낙관적인 인간론은 다 깨어지고 이제는 그 두꺼운 칸트의 책을 읽는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셋째는 철학적이 아니고 과학적이고 의학적으로 인간을 이해한 지그문트 프로이드입니다. 그는 인간의 꿈을 해석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강한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는 잠재의식을 주장했고 인간의 모든 문제와 병은 그 욕구를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자아와 환경 때문에 초래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상담과 최면을 통해 현재의 문제가 자기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억압적인 사건 때문에 생긴 마음의 병임을 밝혀줌으로 자기를 회복하는 방법을 최초로 도입했습니다. 현대의 심리학이나 상담학은 거의 프로이드의 신세를 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플라톤이나 칸트, 프로이드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죄를 다루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고 인간을 정의합니다. 플라톤은 죄에서 도망치고 있고, 칸트는 죄를 무시하고 있으며, 프로이드는 죄를 병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설명하면서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을 이렇게 간단명료하고 분명하게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하늘엔 별, 내 가슴엔 반짝이는 도덕률” 그런 말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너희는 죽었다고 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 우리말 성경 1절에는 살렸다가 있는데 원래 원문에는 없습니다. 우리 문장은 주어 동사가 있어야 문장이 성립되기 때문에 5절에 있는 살렸다는 동사를 1절로 끌어와서 주어와 동사를 만들어놓았지만 원래는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로서 다 그 가운데 행하던 자들이라고 2절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훨씬 더 강렬한 원래의 의미입니다. 인간이 어떤 상태이라고요? 구원받기 이전에 너희는 “죽을 뻔한”이 아니고 “죽었다”입니다. 얼마나 강렬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이 인간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할 때 죽음이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자연인은 이렇게 영적으로 죽은 존재로 태어나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 감각도 없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서 그렇게 지옥 갈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3절에서는 본질상 진노의 상태라고 말하죠.

인간을 이렇게 영적으로 죽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허물과 죄입니다. 허물은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해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손상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파괴했습니다. 선과 악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것을 인간이 결정하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뛰어들어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여서 너무나 탁월하고 위대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티끌로 지어진 창조주와 비교할 수 없는 질적인 한계를 가진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과 맞먹으면 안 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권위아래 있는 것을 만족하지 못하고 창조주의 영역을 침범해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한 욕심이 바로 허물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해서 하나님처럼 되려 한 허물은 인간의 인격, 몸, 삶을 하나님과 대적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피조물 된 자신의 한계를 지키고 부족함을 인정할 때 제대로 쓰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잊고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도하신 목적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삶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에 대해 죽어 있으니 마귀를 따라갑니다. 2절을 보면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마귀가 공중 권세를 잡은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서 공중은 물리적인 공중이 아니라 주도권, 세력, 헤게모니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사단은 자신과 함께 타락한 졸개들을 통하여 이 세상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치관과 사상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속이고 세뇌시키고 움직이고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들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편 마귀는 육신이 아니고 영입니다. 그래서 직접 몸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거나 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충동해서 역사합니다. 역사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한다 할 때 에네르게이아와 같은 단어입니다. 에네르쿤토스. 힘을 전달해서 작동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마귀의 역사는 좋은 방향이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자극해서 하나님에 대한 반감과 의심과 분노를 불어넣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만듭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시기와 증오를 심어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합니다. 그것이 에네르쿤토스 마귀의 역사입니다.

또한 마귀는 이 세상의 풍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역사합니다. 즐기며 사는 것, 방탕하게 사는 것이 최고인줄 아는 가치관을 심어줍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예전의 대학 축제 때 꼭 있었던 행사 중에 막걸리 마시기 대회 맥주마시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남자의 힘, 남자의 영광과 자존심이 술을 잘 마시는 데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맥주 1000시시, 막걸리 한 사발을 누가 더 빨리 많이 마시는가를 시합을 했는데 빠른 시간에 쉬지 않고 가장 많이 마시는 사람이 주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박수치면서 와 세다고 해주었습니다. 그때는 남자가 술을 못 마시면 사나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여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습니까? 얼굴도 모르는 남편에게 시집와서 너무 빨리 남편이 죽으면 새로 시집도 못가고 시댁의 귀신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여자를 열녀라고 추앙하면서 그런 분위기를 사회가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여자들은 한이 있었습니다. 다듬이 소리를 들으면 애달프죠. 음악도 대금소리 우~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열녀들은 전부 그 한을 가지고 열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누가 열녀문 세워주면 여자들이 다 때려 부술 것입니다. 우리를 어떻게 보고 이런 열녀문을 세워서 억압하느냐고 다 때려 부술 것입니다.

이렇게 시대마다 사조가 있고 정신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다 그 시대의 사조에 따라 삽니다. 요즘은 처녀가 순결을 지키고 있으면 부끄러운 것, 바보 취급합니다. 인생을 즐기기 못하면 바보가 됩니다. 이런 가치관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작품입니다. 세상 풍속을 좇는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세상풍속을 따른다고 했는데 이것은 의역입니다. 이 세상의 시대에 너희가 살았다가 원문그대로입니다. 어떤 세상입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그런 세상의 시대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 똑같이 그 물을 먹고 마시고 살았습니다. 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그런 뜻이죠. 우리는 사도를 포함한 유대인들입니다. 이방인인 너희와 유대인인 우리가 다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어떤 한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진술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삶은 가장 도덕적이고 거룩하게 보였지만 실제로 안으로 들어가 보면 똑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하며 죄 가운데 삽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생의 공통적인 문제가 이 문제입니다.

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육체는 타락한 본성이며 마음의 원하는 것은 나쁜 것을 오래 동안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가 즉각적인 생리적 욕구라면 마음의 원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나타내지는 않지만 욕망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경영하는 것입니다. 어떤 욕망이 있을 때 욕망을 즉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속에 깊이 감추어두었다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고 결행하는 고단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인간은 깊은 너무나 깊은 죄의 웅덩이에 빠져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알게 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기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붙들지 않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간단한 성경공부나 심리적인 치료나 철학적인 학문연구로 될 성질이 아닙니다. 어디 잠깐 휘익하고 떠나 봄바람을 맞고 오면 처리되거나 철마다 가구를 새롭게 배치하고 머리를 새로 하면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는 해결이 안 되는 것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인간이 처한 이 처절한 실존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이런 심각한 인간의 죄 문제를 다루는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죄로 인간을 파악하는 것은 너무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죄와 회개로 인간의 본질을 다루기보다는 다른 것으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기독교가 윤리와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이런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간과하고 단순히 윤리와 사회구조의 문제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마치 암에 걸린 사람을 소화제나 타이레놀로 치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윤리나 상담으로 치료될 문제가 인간의 문제라면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이 지적하고 있는 이런 인간의 실상을 부끄러워하거나 기분 나빠 한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하고 있고 교회가 친교단체나 동창회 같이 되는 이유는 다 이런 인간의 죄의 깊이를 무시하고 이런 처참한 인간의 실존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성경의 수술대 위에 이런 우리 자신을 세워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복음으로 새로워지는 솔직함이 필요합니다.

왜 교회가 영광스러운 공동체입니까? 왜 성도의 구원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까? 이런 진노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그 사랑 앞으로 돌려세우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대로만 살던 인생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인생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을 따라 세상 풍조를 따라 살던 우리를 부르심의 소망을 향하여 살도록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믿음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있음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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