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처방(7) : 강함보다 약함에서 구원의 증거를 삼으라

이대희 목사/ 예즈덤 성경하브루타 연구소 소장,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전 서울장신대 교수, 에스라성경대학원 대학교 성경학 박사과정 수료, 저서 <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이대희 지음, 베이직북스, 2016 세종도서 올해의 책 선정) <유대인의 탈무드식 자녀교육법> 외 200여권의 성경공부와 하브루타 관련 도서 출간. 지난 20여 년 동안 성서한국, 성서사람, 성서교회 비전을 갖고 한국형 예시바 성경학교인 예즈덤성경학교에서 (매주 월요일) 하브루타 방식으로 66권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유대인교육과 밥상머리를 오랫동안 연구했으며 현지 이스라엘의 정통 마을과 회당과 가정, 미국의 유대인 공동체를 방문하여 안식일과 회당예배와 탈무드 토론에 참여한 경험과 15년 넘게 밥상머리를 전파하고 있는 유대인자녀교육 전문가이며 사회적으로도 수많은 강연 경력이 있다

우리가 약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가진 기준점의 점검이 필요하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구원의 증거의 기준점을 다른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구원의 증거를 크고 강하고 화려한 업적보다 자기의 부족함에서 구원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크고 강한 것에 밀려 작고 연약함의 가치를 잊어버렸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은 구원을 이루는 일 역시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됨을 말한다.

지금 나타난 나의 연약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회개하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하며 주님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구원의 증거가 된다. 지금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확실한 구원의 한 증표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허물과 연약함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는 용기와 결단이 어렵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할 때만 주어지는 성령의 능력이다.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숨기는 것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기회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약함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오히려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좋은 구원의 증거가 된다. 바울이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욥은 자기가 모든 것을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실패의 나락에 빠져들 때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했다. 사단이 이 약점을 노렸는데 욥은 그것을 이김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임을 우리에게 증명했다.

▲Job and His Friends. 욥과 그의 친구들, 1869, Ilya Repin, Russian Museum

우리도 나에게 있는 강한 것 보다 연약한 것에서 구원의 증거를 찾으면 생각보다 많을 수 있다. 복음은 세리처럼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자에게 찾아온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약함과 부족함 속에서 그리스도를 자랑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구원의 증거는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랑 보다는 그리스도를 자랑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지금 당한 고난과 연약함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가장 좋은 도구다. 문제는 자기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과연 주안에서 자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용기 있게 자기 포기선언을 선포하기는 어렵다. 강함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면 연약함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이런 자기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속에서 주님이 은혜를 드러낼 수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자기에게는 구원 받은 삶의 증거가 될 수 있다.

누가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인가? 그것은 죄를 하나도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죄를 지었지만, 빨리 자기의 부족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사람이다. 만약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 안에 성령이 계신다는 증거가 된다. 나는 지은 죄를 빨리 인지하고 즉시 회개하는가? 죄에 대한 민감함이 있는가? 아니면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고 강팍한 모습인가?

산상수훈의 말씀(마5장)처럼 심령이 가난하고 죄에 대해서 애통하고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구원이 있다는 표징이다. 가시적인 선을 행하는 것으로만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지 말고 오히려 세리처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자복하는 겸손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보면 어떨까?

교회의 역사속에서 바울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들라면 그는 성 어거스틴(St. Augustinus, 354-430)이었다. 하버드 대학의 철학교수 화이트헤드(Whitehead)가 “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주석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 신학역사에 큰 영향력이 끼쳤다.

▲ 산드로 보티첼리, 서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c.1480, 프레스코, 오그니산티 교회, 피렌체

어거스틴이 이렇게 위대한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타락과 방황으로 불신앙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서 인류사에 위대한 성인의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후대 역사가들이 그를 성인으로 이름 붙인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쓴 「고백록」에 있다. 그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과거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어거스틴은 자신에 대한 인기와 존경심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 「고백록」을 써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의 잘못을 숨기고 좋은 점만 기록할까 생각하는 반면에 그는 자기가 진정 큰 죄인이라고 고백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성인의 칭호를 주었다. 의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고백한 것이 진정한 의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어거스틴과 그의 어머니 모니카, Ary Scheffer, 1846

힘들고 어려울수록 자기의 부족함을 철저히 인정하고 주님에게 도움을 구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곧 구원을 이루는 삶이 된다. 이사야가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처럼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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